빌 브란트(Bill Brandt)는 사회사적인 가치를 보유한 서정을 기록함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유머를 쏟아낸다. 어둠을 흡착한 탄광촌의 인광, 잇몸을 번뜩이는 시청 앞에서의 연설, 흰 빨래가 널린 마당 위로 춤추는 여자의 치맛자락, 적막이 감도는 런던의 밤거리, 서빙을 준비하는 긴장한 표정의 시녀들, 길 모퉁이에 덩그러니 나뒹구는 마네킹의 오른팔, 유쾌하게 행진하는 소녀의 웃음, 밀짚과 엮인 스톤헨지의 우윳빛 안개, 저녁식탁을 장식한 가장들의 피곤함과 부인들의 기다림, 언덕을 뒹구는 청춘들의 정열적인 몸부림, 카페에서 마주치는 노련한 포즈들의 외면과 그 사람들의 포트레이트...
사물과 장소, 인물에 대한 광학적 입찰은 환상의 경계로 망막을 채찍질하는 동시에 빌 브란트의 장기인 관음에의 노련미를 배가시켰음에 틀림없다. 개인적인 세계로 전환한 후반기의 작업들에서 좀 더 천연한 감정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누드를 바라보는 관점 Perspective of Nudes>. 유혹을 허락하지 않는 무한 공간을 비집고 들어서기엔 인간에 대한 열정이 탈진해 있다면 평소 어슬렁거렸지만 주목하지 않던 장소들과 인물들을 응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이크로 렌즈로 보아야 드러날 사건과 낱장의 사람들은 골동품을 휘감은 빛바랜 먼지 얼룩으로 노릿한 광택을 발산하는 환각을 몰고 올 것이다.
왜곡을 최소한으로 저지하는 망원보다 인물의 대비조차 비대칭의 환상으로 뒤바꿔버리는 광각의 투영은 소란스러운 자기애로 들리긴 한다. 귀를 막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한 공간에 모두 담을 수 없는 인체의 조각들은 지하에 저장된 상상력을 확장시킬 것이고 성적쾌락이나 욕구의 물증을 넘어 나로 전이되는 뭉근한 고찰을 남길 것이다. 하얗게 태워버린 어둠의 진액은 그림자 속에서 그 의미를 묻게 한다. 나만을 천착할 여유가 있다면 평상을 넘어선 과도한 노출에도 기꺼이 손 내밀고 싶다.
2005. 12. 12. MONDAY
가끔 인간의 발가벗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기보다 몸에 갇힌 영혼이 보이지 않음에 기분이 저하되곤 한다. 태초로 돌이키는 적나라함은 뇌리를 어지럽게 표류시킨다. 표면적으로는 특정한 대상을 표상하지만, 결코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내밀함은 인간이 품을 수밖에 없는 한계이다. 눈앞의 대상이 투명하지 않을 땐 탐구적 시각을 각자의 렌즈에 적용했던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 철학자의 관점을 빌려본다. 우주의 별처럼 닿지 않는 대상을 직시하는 망원과 미세한 생물체처럼 현상에 근접하는 광각을 사용하면 현실을 바라보는 행위가 오히려 초현실적인 접근으로 보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마이크로 코스모스, 세상의 진면목은 실재와 멀든 가깝든 옷을 입든 벗든 진실한 이해에서 멀어져 있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