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 아저씨 Jun 22. 2024

내 마음속의 기억산책 (5)

고등학교시절



"1,979년 ~ 1981년, 고등학교 3년"


개인적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공부에 매진했던 시기였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정치사 획을 그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때이기도 했다.


유신독재를 반대한 부마항쟁으로 촉발된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ㆍ1,979년 10.27  비상계엄령 선포 및 전국대학 휴교령

ㆍ1,979년 12.12 신군부세력에 의한 군사반란사건

ㆍ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및 전국대학 휴교령

ㆍ1,980년 7.30 과외금지조치와 대학 본고사폐지

ㆍ1,981년 3.3 전두환 대통령 취임


매일매일이 격변의 시기였다.

내가 살았던 안동은 그 당시만 해도 중앙선 열차 외에 교통수단이 녹록지 않아 행정구역상으론 시였지만 고립무원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나라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고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온 대학생 형들로부터 간간이 서울이나 대도시의 사정을 귀동냥으로 얻어 들었다.

대학입시라는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나라안의 상황은 나에겐 그저 강 건너 불구경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입시제도의 변화와 역사적 사건들은 고등학교 3년 학창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대학 입학시험에서 본고사폐지는 어쩌면 내가 서울에 입성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가장 열심히 놀고 공부하고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던 시간이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가장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보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년, 과거의  그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 보자.





◇ 공부라는 것에 대하여.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의 논어에 실린 군자삼락의 첫 번째 즐거움이다.

배움으로 인해 학문이 쌓이고 타인으로부터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을 때 누구나 기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나아가 그것으로 생계가 해결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뿐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부는 기쁨을 주기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수단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공부의 1차 목표는 좋은 대학, 유망한 학과에 입학하는 것이다.

과거에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70년대에는 대학입시를 위한 과외망국론이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었고 지금도 미래의 입시생을  둔 부모님들의 호주머니는 입시학원이나 교습선생님들의 것이나 다름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 당시 서울 학생들은 중학교 때부터 고액과외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나는 과외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게는 교과서 외에는 다른 수험책이 없었고 고등학교에서도 지금까지 공부를 해 온 것처럼 교과서만으로 시험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충격의 시간이  다가왔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시험문제를 받아 든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교과서에 없는 문장과 문제들이 일부 출제가 된 것이었다. 당연히 시험문제를 제대로 풀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나온 시험결과도 초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으로 받아 본 성적이었다.

"60명 중에 13등."

시험을 망쳐버린 것에 비하면 그나마 괜찮은 등수였지만 나로서는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각지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잘한다는 친구들이 선발고사를 통해 입학을 했다는 것이 새삼 뇌리에 각인되었다.


성적표를 받아 들고 담임선생님과 일대일 면담을 하며 궁금했던 사항들을 여쭤보았다.

대학입시제도와 시험과목 및 출제범위 그리고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생님의 대답은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내게는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학습방법으로는 대학입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예비고사 + 본고사"제도였던 당시에는 예비고사를 치른 후 그 결과에 따라 수험생이 본고사를 치를 대학교를 선택한다고 했다.

예비고사는 국정교과서 위주로 출제되지만 전국에 다양한 국정교과서(영어 교과서가 13가지 종류)가 있고 대학자체에서 치르는 본고사는 교과서에 있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의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기본적인 교육일 뿐,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별도의 수험서로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과의 면담 이후 주변 친구들을 돌러보니 각자 나름대로 교과서 외 수험서들을 공부하고 있었고 일부 친구들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과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정지와(天井之蛙)"

한마디로 공부에 관해서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이다.


1학년 첫 시험 이후 5월쯤, 그때부터 공부와 나만의 조용하지만 피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기에 낮시간에는 학교를 마치고 나서 만화방에 가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저녁 식사 후 잠깐 눈을 붙이고 밤 9시부터 새벽 2시경까지 공부를 했다.

대학 본고사를 위해서 국어, 영어, 수학은 과목마다 매일 공부를 했고 나머지 과목은 하루 한 과목정도를 꾸준히 학습했다.


영어와 수학은 선배들로부터 수험서를 얻어서 기초부터 독학을 시작했다.

수학은 다양한 기초 수험서를 거쳐 그 당시 최고의 수험서인 "수학의 정석"까지 홀로 학습을 하는데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 그 이외의 수험서도 공부를 했다.

국어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그 당시 자주 출제되었던 국내소설이나 고전문학서를 줄거리 위주로 파악을 했다.

문제는 영어과목이었다.

그때까지 영어의 발음기호 읽는 법도 몰랐다.

단어장에 한글로 쓰인 것으로 영어단어를 외우던 수준이었기에 나에게 영어공부는 최대의 난제였었다.

일단 문법서의 고전이며 영어 입문자들에게 그 당시 최고 인기였던 속칭 빨간 책 "기본영어 삼위일체"를 얻어 영어 문법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일차적으로 발음기호 읽는 법이 맨 앞장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발음기호를 알고 그제야 영어 사전을 찾아볼 수 있었고 발음기호만 보고 영어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벙어리가 문이 처음으로 트일 때와 같은 천지가 개벽하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을 시작으로 성문기본영어와 다양한 영어 수험서를 학습하고 마침내 성문종합영어독학으로 시작했다.

노력은 나를 배신하진 않았다.

시험이 계속될수록 학교성적이 올라갔고 대학 본고사를 위한 기초학습은 어느 정도 된 듯한 자신감이 있었다.


1학년 그해 겨울방학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기였다.

두 달 동안 눈만 뜨면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독서실은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구공탄 난로 2곳만 있는 추운 독서실이라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등록학생이 나까지 채 10명이 넘지 않았던 곳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혼자 있는 날에는 난로 위에  라면을 끓여서 먹기도 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공부를 하기에 내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추위를 이겨가며 국영수를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어느 순간 혼자 공부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또 영어가 문제였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는 것이었다.

시간을 쪼개어 모든 과목들을 공부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다.

친구들이 하는 과외를 받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집 사정이 과외를 받을 만큼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자괴감이 들어 뒷산에 올라 한바탕 펑펑 울기도 했다.

가계를 홀로 책임지고 있는 형님을 생각하면 과외는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지만 혼자 공부를 하는 것도 내게는 더 이상 무리였다.

고민 끝에 형님께 몇 개월만이라도 영어 과외를 받아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형님은 어려운 사정에도 흔쾌히 과외를 허락하셨고 그해 1980년 7월 과외금지조치가 발표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영어 과외를 받았었다.


혼자만의 노력으로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물론 공부를 해야겠다는 나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과외를 하게 해 준 형님의 결단이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더해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여름방학 동안 서울 노량진 대성학원등록(선생님의 추천과 배려로 방학 전 수강이 가능했으나 재학생 과외 및 학원수강금지로 실현이 안됨)서울법대를 다니던 선배의 도움(종로학원의 전 과목 수강교재와 국정 영어교과서 8종을 구해다 줌)도 입시를 준비하는 나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도움과 지원이 없었다면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입학을 한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문대에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신군부의 과외금지와 본고사 폐지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고사폐지로 대도시와 지방학생과의 학력격차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큰 오점을 남겼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큰 선물을 남긴 정권이었다는 것도 어쩌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3학년때는 혼자서 방을 쓰며 공부를 했다.

구공탄 아궁이를 쓰는 옛날 한옥집이 늘 그렇듯이 내 방은 위풍이 심해 머리를 내어 놓고 잘 수 없을 만큼 추웠다.

학력고사 전날.

추운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기 전에 방문을 조금 열어 놓고 일찍 잠에 들었다.

연탄가스로 행여나 학력고사 시험을 못 보게 될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3년 동안 노력한 것이 시작도 못하고 허사가 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연탄가스사고는 없었고 다음날 학력고사 고사장에 무사히 입실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 3년.

다른 일들도 많았지만 나로서는 후회 없이 공부를 했었던 3년의 시간이기도 했다.





◇ 소중한 추억들


공부가 본업이었다면 또 다른 소중한 추억들을 만든 것은 요즘 말로 나의 부캐라고 할 수 있겠다.


추억 하나 ~~ 차전놀이


안동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차전놀이와 하회탈춤.

내가 다녔던 안동고는 국가무형문화재인 차전놀이 전수학교였다.

홀수 연도에 입학한 학생들이 전수자로부터 민속차전놀이를 배워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까지 2년 동안 차전놀이공연을 한다.

다행스럽게 나는 홀수 연도에 입학을 해서 차전놀이 공연에 참여를 할 수 있었다.



한 학년 전체학생 약 480여 명이 장군, 농악패, 동채꾼, 몰이꾼등의 역할을 맡아 일주일에 한 번씩 전수자의 지휘하에 맹연습을 했다.

나는 농악패에 들어가 꽹과리를 맡았다.

따로 연습하는 시간도 많고 고깔을 직접 만들어야 해 수업에 빠지는 횟수가 많았다.

한마디로 땡땡이치며 노는 시간이 가장 많은 팀이 농악패였다.

행사규모에 따라 참여 인원이 제한될 때에도 농악은 필수라 빠지는 경우가 없었다.

차전놀이 공연은 안동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를 하고 드라마촬영이나 각종 홍보행사 촬영에도 자주 참가를 했다.

2년 동안 많은 행사에 참가를 했지만 기억에 남는 행사 몇 개가 있다.

가장 아쉬웠던 기억은 1979년 대구에서 개최된 전국민속경연대회 축하행사였다.

행사 전날 사전 리허설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구 공설운동장 인근 여관에 학생들 모두 투숙을 했다.

밤늦게까지 놀고 새벽녘에 눈을 떠보니 어스름한 안갯속에서 장갑차와 군인들이 대구시내를 점령하고 있었다.

1979. 10. 26 사건으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계엄령으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는 바람에 본 공연을 못하고 참가 학생 모두 안동으로 씁쓸히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외에도 가수 조용필과 신중현을 실물 영접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전두환대통령 취임축하공연과 드라마 "토지"를 유명 배우들과 같이 하회마을에서 촬영을 했던 것은 시골의 고등학생들에게는 큰 자랑이자 화젯거리였다.



대학졸업 후 회사에 입사를 해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King 파하드 메디컬시티 건설현장에 2년 동안 근무를 했던 적이 있었다.

80년대 초 공사비만 5억 7천만 불에 수주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사였다.

1987년 현장 직원들에게 신년 탁상용 대한민국 홍보달력이 지급되었는데 차전놀이 사진이 있었다.

7년 전 고등학교 때 홍보용으로 촬영한 차전놀이 전경사진이었다.

나와 익숙한 친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이역만리 사우디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대대적인 국가행사였던 "국풍 81"참가도 예정되어 있었지만 3학년이라 입시준비로 참여를 못 했던 것이 아쉽지만 차전놀이는 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던 일등공신으로 꼽을 수 있겠다.




ㆍ추억 둘 ~~ 안동고등학교 음악제.


그때도 가을이 되면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축제행사를 했다.

일 년 동안 특별활동을 하며 쌓아 온 장기들을 공연의 형식을 빌어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축제날은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과 부모님들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고 가벼운 요깃거리도 사 먹을 수 있는 간이장터를 준비하는 학교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 년에 한 번 있는 학교별 대규모 축제행사였다.

타 고등학교들은 연극이나 미술작품전시  그리고 노래와 탈춤등 다양한 행사를 했었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도 학년초부터 열심히 축제를 준비했는데 타 학교와는 달리 음악공연이었다.

학교 남성합창단이 주축이 되어 합창, 중창, 독창을 하고 간간이 사물놀이나 그룹사운드 공연을 할 때도 있었다.



일 학년 초 음악 실기시험에서 노래를 부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합창단 단원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잡았다.

가을에 열리는 음악제 준비를 위한 합창곡연습, 전국 건전가요 경연대회 참석등으로 2학년 말까지 음악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학년때는 국악을 전공한 음악선생님이 합창반을 이끌었다.

전공이 국악이다 보니 가을 음악제에 좀 더 색다른 공연프로그램을 올리고 싶어 하셨다.

그 결과 친구와 둘이서 선생님께 직접 가야금을 배워 음악제에서 가야금 병창을 하기도 했다.

공부보다는 합법적으로 수업에 빠질 수 있는 다양한 과외활동이 내게는 더 매력적인 선택이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ㆍ추억 셋 ~~ 응원단장


고등학생이 되면 매년 참가해야 하는 큰 행사가 있다.

안동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가 참가해 우열을 가리는 교련실기대회와 시민체육대회.

교련과목은 그 당시 고등학생들에게 의무교육이라 남녀학생모두가 교련과목 시간에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었다.

남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총기를 휴대한 채 군사집체훈련을 받았고 열병식과 분열도 했다.

마찬가지로 여학생들도 기초군사훈련과 긴급구조, 그리고 응급조치훈련을 받았다.

10월이 되면 안동시내 고등학생들 모두가 시민운동장에 모여 종목별로 학교대항 시합을 했었다.

소총분해결합, 수류탄 던지기, 부상병 붕대매기, 100미터를 달리며 군장 갈아입기등 실제 군대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교련실기대회 종목이었다.



또 하나 큰 행사인 시민체육대회는 전체 안동시민이 참가하는 시민 축제로 마을단위와 고등학교별로 우열을 가리는 대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각종 육상종목과 줄다리기등 매년 다양한 종목이 벌어졌다.

대회 한 달 전부터 참가 선수들은 운동연습을 하고 학교밴드부, 응원단 그리고 나머지 전교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열심히 응원연습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응원단을 이끈 경험이 있어 당연히 응원팀에 자원을 해 2학년때까지 학교 응원단장맡았다.

학교대항 모든 행사 때에는 밴드부와 학생들을 이끌며 열심히 선수들의 선전을 독려했다.

당시에는 연고전 응원이 워낙 유명하던 시절이라 연세대에 입학을 해 응원단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학력고사 시험을 마친 후 담임 선생님의 설득으로 결국 타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지금의 삶에 후회는 없지만 누구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내 의지대로 했으면 지금 현재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ㆍ추억 넷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일 학년, 학년별 반대항 체육대회.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맞는 행사이다 보니 반별로 경쟁이 치열했다.

당연히 종목별로 선수선발이 우승을 위한 최대의 관건이었다.

나름대로 종목별로 경쟁력 있는 대표선수를  뽑았는데 5킬로미터 단축마라톤 선수가 문제였다.

우리 반에는 마라톤에 경험이 있는 학생이 없어 누구도 선뜻 지원을 하지 않았다.

올림픽경기와 마찬가지로 마라톤은 마지막 경기로 치러지는 하이라이트 종목이어서 반별로 최소 1명은 무조건 참가를 해야 했고 배점 점수도 높았다.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자 내가 불쑥 한마디를 했다.

"마라톤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친구들의 자발적 참여를 위해 한 이 말로 인해 결국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마라톤 선수로 내가 지명을 받게 되었다.

다른 반에는 단축마라톤에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좋은 성적은 애초에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초반에 포기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수선발 이후부터 밤마다 강변을 달리며 연습을 했다.

처음 며칠은 숨이 가쁘고 힘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주는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체육대회 당일.

종목별로 시합을 마치고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다.

200 미터 운동장 25바퀴를 도는 것이었다.

출발 총성이 들리고 두 바퀴를 선두에서 달렸다.

그것이 마라톤 초보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나의 한계였다.

세 바퀴째부터 점점 나를 앞서 달려가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선두와 한 바퀴 이상 차이가 나면 자동탈락되는 규칙이 있었다.

열 바퀴쯤 돌자 자동탈락하는 친구들이 나타났고 20번째 바퀴를 도는 쯤에 나도 선두와 한 바퀴 이상 차이가 났다.

심판을 보는 선생님들이 나를 보고 경기에서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 친구들의 기대와 연습한 시간들이 생각나 경기를 만류하는 선생님들의 손을  뿌리치고 끝까지 완주를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선수는 8명, 나는 꼴찌로 들어왔다.

규정상으론 탈락이었지만 8등까지 점수가 배정되어 있어 반 점수에 1점을 기여했다.

우리 반이 그때 몇 등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위권성적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마지막 경기였던 마라톤에서 꼴찌로 들어왔지만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많은 박수와 갈채를 받았던 그날은 내겐 잊을 수없는 하루였다.


ㆍ추억 다섯 ~~ 만우절에 온 편지 한 통


1981년 4월 5일 만우절.

집 대문 안에 편지 한 통이 떨어져 있었다

편지봉투에는 주소도 없이 내 이름석자 ㅇㅇㅇ앞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만우절 장난편지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편지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자칭 고 3이라는 여고생의 애틋한 사연이 편지지를 두 장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입시준비로 인한 스트레스로 너무나 힘든 자신.

그리고 나에 대한 짝사랑(?).

고 3의 남은 기간을 같이 고민하며  만남제안.

일주일 후 만남장소 및 시간지정.


나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만우절 친구들의 장난이려니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편지를 보냈을만한 친구들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같은 반은 물론 다른 반 친구들에게도 편지를 보여주며 "자수하여 광명을 찾기"를 권했지만 모두들 절대 본인은 아니라며 항변을 했다.

친구들의 장난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입시준비에 정신이 없는 친구들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럼 누가 그런 편지를 보냈을까?

만우절 장난이라는 생각이 굳어졌지만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편지 내용이 너무나 절실했다.

그래서 밑져봐야 본전, 여고생 한 사람 살려야겠다! 는

소명감으로 형님께 용돈을 받아 약속장소인 제과점으로 갔다.

가장 아끼는 봄 외출복과 방 안 장롱 위에 고이 모셔둔 가짜 랜드로바 가죽신발을 신고~~~~.

참고로 그 당시에는 신발을 훔쳐가는 일이 많아 나이키신발이나 메이커 가죽구두는 댓돌에 내어 놓을 수가 없었다.

특히 나이키신발은 학생들이나 젊은 층들의 최애품이어서 잠시 한눈을 팔면 바로 사라지는 물건 중 하나였다.

일단 제과점에 들어가 손님들이 알아보기 편한 자리를 찾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나를 알아보기 쉽도록 얼굴을 쑤욱 내밀었다.

여학생들도 몇 팀이 들어왔지만 편지를 보낸 당사자는 아닌 듯했다.

그렇게 훌쩍 두 시간이 지나갔다.

더 이상 기다려봐도 소용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한 빵과 우유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난을 친 친구가 걸리기만 하면 혼쭐을 내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주먹을 불끈 지었다.

범인도 찾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으로 만우절편지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며칠이 지나갔다.

두 번째 편지가 또 집안에 던져져 있었다.

약속한 장소에 왜 나오지 않았냐며 나를 원망하는 것으로 시작해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하는 상황이 구구절절 쓰여 있었다.

이번엔 꼭 만나자며 시간과 장소를 다시 알려 주었다.

ㅇㅇ파출서 길 건너편 공중전화박스 앞.

이번엔 밤 시간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속는 셈 치고 또 나가 기다렸다.

공중전화박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 다시 편지는 오지 않았다.

일 년 후 대학진학을 하고 처음으로 남녀 친구들과 포항에 있는 내연산 계곡으로 여름캠핑을 간 적이 있었다.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그토록 궁금했던 만우절 편지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여고생들 사이에 유명한 에피소드 중에 하나가 바로 만우절 편지였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랬다.

고 3 여고생들이 남학생 3명을 선택해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며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셋 중에서 오직 한 학생만이 두 번씩이나 나와 오랫동안 기다리다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모의를 주도했던 친구들은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다음날 학교친구들에게 결과를 낱낱이 공유했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 번째 장소였던 제과점에서 여학생들이 조금 떨어진 뒷자리에서 킥킥대며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생각났다.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리 낯 선 얼굴들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고 3 시절에도 여학생들의 던지기 게임놀이에 착한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날 캠핑을 같이 한 친구들에게 혼자 나간 남학생이 나였단 사실은 차마 밝히진 않았다.

깊이 마음속에 숨겨둔 부끄러움은 오직 나만의 몫이었다.


ㆍ추억 여섯 ~~ 반팅(학급 단체미팅)


고등학생에게 가장 큰 중압감을 주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입시 스트레스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상 어느 시대 그 누구도 고교 3년간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입시지옥이 중학교 때로 당겨졌다는 말도 있고

 대학입학으로 고생 끝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성장기였던 시절에는 대학졸업 후 취업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좁아져 버린 취업문 통과를 위해 재학 중에 어학연수와 각종 인턴과정을 밟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가 되었다.

3학년 말 마침내 학력고사를 마치고 나니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정규수업이 자율수업으로 대체되었고 오전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유시간이 많았던 그때 유행처럼 추진되었던 것이 반팅(학급단체미팅)이었다.

남고학생 한 반, 여고학생 한 반 학교별 단체미팅.

보통 한 학급 인원이 60명 정도 되었으니 불가피하게 빠지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100여 명이 한 장소에 모여 파트너를  정하고 만남을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 반도 반팅을 추진했다.

추진자는 나를 포함해 세 친구.

섭외 끝에 ㅇㅇ여고와 반팅날짜를 정하고 남자들이 장소를 정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장소 수배가 쉽지 않았다.

한꺼번에 100 명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제과점이나 분식집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에 야외에서 만날 수가 없어 결국 다방으로 미팅장소를 정했다.

친구 어머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간신히 설득을 해 미팅시간에 다방을 통째로 대여하기로 했다.

미팅 당일.

다방이 있는 구석진 골목으로 남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사복차림이었지만 교복을 입고 온 친구들도 있었다.

주선자들은 친구들이 다방에 들어오는 대로 파트너가 있는 테이블로 안내를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방에는 일부 손님들이 남아있어 칸막이를 치고 장소를 분할했지만 손님들과 출입동선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학생들이 대낮에 다방에서 단체로 미팅을 하는 것을 본 손님이 경찰서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갑자기 칼빈소총을 어깨에 맨 경찰들이 다방으로 들어와 여학생들을 다방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다방밖에는 소위 닭장차라고 불리는 경찰버스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나오는 대로 경찰버스로 태워졌고 남학생인 반친구들은 슬금슬금 뿔뿔이 흩어졌다.

여학생들은 호송버스에 탄 채 학교로 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일을 마무리하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다방에서 일어난 미팅사건은 학생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다음날 등교하자 바로 교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은 교장선생님이 미팅 대표자를 호출한 것이었다.

죄송한 마음으로 교장선생님께 미팅과 관련된 들을 사실대로 낱낱이 말씀을 드렸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 징계를 내릴 수도 있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씀도 있었다.

사건 발생 며칠 후 미팅 상대였던 여학교 교무실에도 불려 가 선생님들께 남학생대표로 사과를 했던 기억도 있다.

다행히 미팅사건은 더 이상 크게 확대되진 않았다.

여학생 몇 명은 근신정도의 징계, 졸업식에 상이 예정되어 있었던 여학생은 상제외 그리고 미팅당시 입었던 사복은 압수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고 들었다.

우리 반친구들은 학교에서 심사숙고 끝에 교장선생님의 경고로 마무리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동이란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미팅에 참가한 많은 친구들에게 잊을 수없는 고교시절의 추억을 남겨준 사건이기도 했다.



일 년, 365일 그리고 3년.

평균수명을 80세로 가정한다면 비중이 4%가 되지 않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고교 3년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이과, 문과를 정하고 춤과 노래 그리고 예술을 선택하는 것도 그 시기에 모두 이뤄진다.

그 선택에 따라 3년간의 노력이 더해져 대학이 결정되고 학과가 선택이 된다.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다니는 청소년기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즐겁고 소중한 기억들이지만 그 당시 현실에서는 늘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외롭고 긴 시간의 터널을 무난히 넘길 수 있도록 그 시간들을 나와 함께 해 주었던 가족, 친구, 선생님 그리고 주변에 있어 준 사람들이 너무나 고맙다.





작가의 이전글 백야의 나라, 북유럽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