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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Sep 19. 2023

내 마음속의 기억 산책. (2)

아버지에 대한 기억


내가 태어난 해, 1963년 아버지의 그때 나이52세였다.

1960년대 당시의 남성 평균수명을 찾아보니 남녀평균이 54세다.

최근 연예인이 7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아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덕분에 남성의 힘을 표방하는 광고 여러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 남녀 평균수명이 85세 임을 감안해 보면 그 당시로 나는 상상하기 힘든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본 적이 없고 가족사진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내가 간직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 머릿속에서 가공된 기억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나둘씩 꺼내어 희미한 추억으로라도 남겨보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하나.

"딸기 코 영감"


아버지 신체의 특징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후에 돌아가신 삼촌들의 모습으로 추론해 보면 보통 체격에 건장하셨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에 얼굴과 등에 여드름이 많이 나서 늘 고민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니 아버지도 등짝에 여드름이 많아서 매란도 없었고 짤 때는 징그러워 죽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을 하신 걸로 보아 여드름이 많이 나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을 자주 본 적은 없지만 늘 불콰한 얼굴로 집에 오실 때가 많았다.

옛날 주당들에게 흔히 했던 말로 "술 한 말을 이고 가진 못해도 마시고 갈 사람"이 바로 아버지셨던 것 같다.

어머니도 자주 그 말씀을 하셨고 아버지 코가 발갛게 "딸기코"가 된 것도 술 때문이라고 하셨다.

늘 실핏줄이 발갛게 모여 있었던 아버지의 딸기코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농부에게 막걸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논 밭일을 하시고 거나하게 한 잔 후  대문을 열고 하시는 말씀은 "할마이~~, 내 왔네!!"

였다.

미안한 마음에 한 손에는 임연수 생선 한 손을 들고 ~~~~.



둘.

 "주역, 민간요법 그리고 침술"


지금도 의문인 점이 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농사꾼이셨는데 우리 집에는 늘 의외의  손님이 많았다.

가장 많았던 사람들이 침을 맞으러 오는 손님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침의 효과가 좋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네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침을 많이 맞았다.

어디 아프기만 하면 아버지는 우선적으로 침을 놨다.

어린 나이에 침 맞는 것이 늘 겁이 나서 웬만큼 아파도 아버지 앞에서는 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급체, 구안와사, 담, 몸에 고름이 든 혹 시술, 사시 교정,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내가 직접 당한 편도선 시술등.

아버지는 한의사가 쓰는 침과 수술용 칼로 여러 가지 시술도 직접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의사 자격도 없이 시술을 했다는 것이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아버지의 실력은 외지에 소문이 날 만큼 인정을 받으셨던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민간요법에 필요한 약초에 대한 처방도 많이 하셨고 사주, 궁합, 택일, 작명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언제 한학공부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역과 민간요법 그리고 침술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많이 하셨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아버의 주업은 농사꾼이셨고 요즘 말로 부캐가 무자격 한의사 겸 작명가이었던 것  같다.

작고 하시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살던 집을 팔고 이사를 할 때 짐정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오래되고 큰 보자기에 아버지의 손 때가 담긴 책들이 꽤 있었다.

아버지의 부캐를 이룰 수 있었던 배움의 자취들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셋.

"편도선 수술"


나는 어릴 때 목감기를 달고 살았었다.

목안에 편도선이 부어 침을 삼킬 때마다 통증이 심했었다.

그래서 우리 집 벽장 속에는 감기용 시럽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편도선이 너무 심하게 부어올라 종합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감기와 편도선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계셨고 동네형들이 집에 와 있었다.

책가방을 던져 두니 아버지가 부르며 말씀하셨다.

뒷산에 가서 마음에 드는 솔잎을 따 오라고 하시며 동전을 손에 꼭 쥐어 주셨다.

평소에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재빨리 가게로 가 막대사탕을 샀다.

맛난 사탕을 빨며 뒷산에 올라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 드는 솔잎을 따 작은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와 솔잎 바구니를 넘겨주고 대청마루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지는 따 온 솔잎을 씻어 실로 솔잎 뭉치를 묶으며 뭔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후에 벌어질 일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 편도선 제거 시술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첫째.

일단 동네형들이 나의 몸을 꼼짝 못 하게 잡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했다.


두 번째.

아버지는 묶은 솔잎으로 내 입안에 부풀어 오른 편도선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솔잎의 끝이 뾰족해서 여러 개의 바늘을 묶어 찌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찔러진 부위로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세 번째.

한참을 찔러 몇 번이나 피를 토하게 한 다음 삼베에 싼 무언가를 끓는 들기름에 튀긴 다음 상처 부위를 지졌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는 내 인분을 모아 미리 말려두고 조그맣게 삼베에 싸 두었다고 했다.


네 번째.

집에 늘 상비약으로 있던 갑오징어뼈 가루를 상처부위에 뿌리는 것으로 편도선 제거 시술은 끝이 났다.


어쩌면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무슨 자신감과 용기로 아버지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시술을 자식에게 한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 당시 병원에서  수술을 하면 목부분에 흉터가 생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식 몸에 수술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 위험천만한 불법(?) 시술을 감행한 것이다.


다행히 큰 후유증 없이 상처는 잘 아물었고 그 이후로 목감기나 편도선으로 인해 고생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자신이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생사의 경계에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나와는 관련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구안와사나 사시를 치료하는 것을 아버지 곁에서 자주 지켜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가 치료했던 방법들을 곰곰이 더듬어보면 나름대로 굉장히 과학적이었고 치료효과도 대부분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치료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선물도 많이 받았고 부작용으로 항의를 받은 기억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넷.

"낚시꾼"


"민물고기만 보면 몸써리가 난다."

어머니가 민물고기를 망태 가득 잡아 오면 늘 하시던 말이었다.

낙동강이 곁에 있고 주변에 냇가나 저수지가 많아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민물고기 잡는 것을 좋아했었다.

여름철만 되면 양념을 준비해서 강에서 피라미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는 것이 일상이었고 남는 고기는 집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는 매운탕이나 조림등 요리는 기꺼이 해 주었지만 고기 손질은 내 몫이었다.

어머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낚시광이었다고 한다.

농사철을 제외하고 틈만 나면 낚시터에 가셨고 실력도 좋았는지 늘 망태 가득 고기를 잡아 오셨다고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메기나 민물장어를 푹 고운 뽀얀 국물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자라피가 몸에 좋다고 해서 억지로 마셨던 적도 있다.

물론 막대사탕의 유혹에 넘어가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 농사 외에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은 낚시였던 것 같다.

세월을 낚는 것이 낚시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다섯.

"제사상 장 보는 날"


아버지가 장손이라 제사는 모두 우리 집에서 지냈다.

제사 날이 되면 아침부터 나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제사상 차릴 장을 보며 장터에서 유일하게 군것질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삼촌과 형님집들을 차례로 들러 상차림 비용을 거두셨다.

특별히 금액이 정해지진 않았겠지만 제사상차림 비용으로 형편껏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다음 시장으로 갔다.

어물전에 들러 고기와 생선을 사고 여러 가지 과일을 샀다.

마지막으로 시장에서 나에게 군것질 거리를 사 주셨다.

무얼 사서 먹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반나절을 함께 다니는 유일한 날이었다.

큰 짐은 아버지가 들고 나는 작은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친척들이 와 있었고 그때부터 제사용 음식장만이 시작되었다.

제사가 있는 날은 집안이 사람들로 북적거려 나에게는 하루종일 축제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여섯.

"어머니와의 말다툼"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딱 한번 말다툼을 한 기억이 난다.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 부부싸움을 안 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큰 목소리 내지 않기 위해 두 분 스스로가 자제를 많이 하셨을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자주 가시는 이발소에 나를 데려가셨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손수 집에서 바리깡으로 내 머리를 빡빡이로 깎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날은 어머니가 아버지께 내 머리 이발을 부탁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단골 이발소에서 당신 이발을 하시며 이발사가 내 머리를 그만 빡빡이로 깎아 버리도록 방치하신 것이다.

밤톨처럼 깎여진 모습에 아버지도 내심 당황하신 듯했고 내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훌쩍거리며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내 머리를 보고 무척이나 황당해하셨다.

"아 머리를 어예 이래 깎아 났니껴?"하며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께 항의를 하셨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에 큰 소리가 오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서글픈 마음에  그리고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일곱.

"대학 교육"


자식교육에 인색한 아버지였지만 나에게만은 달랐다.

"자(막내를 지칭하는 나)는 대학을 보내야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아버지의 나이를 감안할 때 내가 대학을 입학할 나이가 되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미리 짐작하셨을 것이다.

손주뻘인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마음에 심사도 착잡하고 해맑게 놀고 있는 나를 보면서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살아서 할 수 없는 일을 어머니에게 당부의 말로 했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 작고 이후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나와 누나들은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형님은 고등학교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하였고 추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여덟.

"아버지 환갑 날"


환갑 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지만 아버지 환갑을 알리는 초대장을 일일이 친척들에게 전하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집에 손님이 와서 북적이는 날은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기에 그날은 내게는 아주 즐거운 날이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환갑 잔칫날 또래 친척들과 우리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있다.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소소한 기억들.


곰방대에 말린 담뱃잎을 넣어 피우던 모습, 그리고

소반에 따로 차려진 밥상에서 식사하던 모습이 생각나지만 아버지 환갑잔치 이후론 거의 기억에 없다.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은 환갑잔치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63세로 생을 마감하시기 전 풍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다.

병시중을 위해 주로 어머니만 아버지 방을 들락거리셨고 가족들은 가끔씩 얼굴을 뵙는 것 외에는 늘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너 방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안부를 확인할 뿐이었다.


사람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없던 힘이 되살아나는 걸까?

방문밖 출입이 거의 없으셨던 아버지가 추운 겨울 집 뒤에 있는 화장실  근처에 쓰러져 계시는 것을 발견했고 그날 저녁 무렵 가족 친지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손주들은 한 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래서 유치원생인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제비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손녀의 글이 나의 아버지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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