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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진 Sep 02. 2023

식상한 표현


  매주 월요일은 시선생님의 시선생님 수업이다. 숲 공모전에 참가해 볼 요량으로 숲에 관한 시를 썼다. 수업시간에 피드백을 받으려고 제출했다.

  제주도 사려니 숲길에서 느꼈던 영험한 기운을 시에 담고 싶었다.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정말 내 몸덩이 하나가 찰흙덩이 같은. 매트리스를 누르고 있는 한 덩이에 불과하지 않은 듯 느껴졌다. 이런 내가 사려니 숲길에 들어서자 해방감을 느



사려니 / 우수진

매일 밤 자리를 펴고 누우면
나는 찰흙 한 덩이가 된다
두 다리를 꼬아 하나로 합해지고
팔은 몸통에 짓이기고
머리는 어깨로 뭉그러뜨리면
마침내 묵지근한 덩어리
하나가 매트리스를 누르고 있다

그대로 두면 아침에 다시 사람 모양을 하고서 일하러 가지
한 평 남짓한 사무실 책상에 달린 투명한 쇠사슬은
부지런히 달그락 댄다 해질 때까지
문득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걸면
온갖 새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쏟아져내려 도시의 바람도 질식하곤 했다

그날은 상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잤다
검은색 유성매직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밤새 짐칸에 실려 새벽에 도착한 곳은 조천읍 교래리 179-10
한라산 깊은 숲, 그곳보다 더 안쪽의 솔아니, 사려니숲길

상자에서 굴러 떨어진 흙덩이는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있다
온통 초록의 모자이크가 뒤덮은 숲은 풀색 국방색 연두색 숲색 수박색 밀림색 쑥색
천남성 뀡의밥 둥굴레 새우난  좀비비추 풀이 슬금슬금 흙덩이에 돋아났다 촛불 대신 풀이 켜지는 흙덩이의 탄신일이다

쇠사슬이 끊어진 아침이 와도 어김없이 다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이젠 노동자 아닌 숲 속의 이방인이지
온갖 새소리가 사방으로 쏟아져내리면 제주 바람이 휘이- 파람을 같이 분다

노루 따라 걷다 보면 나는 멸종된 대륙사슴
머리에서 자라나는 연한 뿔을 쓰다 듬는다
아니 나는 오소리, 제주족제비, 쇠살모사!  제주도롱뇽,  팔색조,  큰 오색딱따구리
숲의 정령이 깃든 도깨비

도시로 돌아가면 자발적으로 쇠사슬을 묶어야 하지만
이제 빼앗기지 않을래
아니, 또 잃는다 해도 언제든 다시 조천읍 교래리 179-10
잘린 뿔에서 하얀 피가 폭죽처럼 공중으로 흩어질 텐데
당신이 사려니인지 사려니가 당신인지 안갯속에서 흐려지는 숲길로


  시선생님의 시선생님은 역시 달랐다. 내가 쓴 시를 진지하게 읽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어떻게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나쁜 것은 지워나가야 하는지 명쾌하게 알려주셨다.


<대략의 기억나는 피드백>

'상자에서 굴러 떨어진 흙덩이는 고개를 들었다.'의 구절은 매우 흥미로워 어린이 동화로 확장해 본다면 재밌지 않을까.


'도시의 바람도 질식하곤 했다'는 기성시인의 흉내를 내는 듯하다.


'나는 찰흙 한 덩이가 된다'는 자기 하소연이나 감정에 억지 호소가 들어있지 않아 담백하면서도 잘 와닿는다.


'책상에 달린 투명한 쇠사슬'은 식상하다. 대체로 식상한 표현들이 많다.


시는 타자와의 대화이다. 그 부분에서 아쉽다.


  그렇다. 내가 쓰고도 식상했다. 어떻게 하면 밥벌이, 출근, 근무시간에 발목이 묶여 무표정으로 무채색으로 일하는 사람을 시적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투명한 쇠사슬까지 밖에 못 갔다. 그러다 목요일 시수업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찾던 표현을.


국수를 삶는다  / 이돈형


사람들은 하루치 몸에 밴 곰팡내를 털며 돌아온다


이 구절을 마주한 순간, 내가 썼던 식상한 말과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 했던 노력에 안도했다. 이 구절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차릴 수 있는 나를 주었기 때문이다.


  식상한 표현이라도 써보면 얻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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