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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진 Sep 04. 2023

끝물


  크리스마스 시즌에 케이크 위에서 위세를 떨치던 황금딸기가 이제는 세 대야에 만원. 어쩌다가 단 놈도 있고 대부분은 밍밍한 놈들이라 맛이 별로다. 끝물이다. 3월 중순, 활발하던 딸기의 기세가 사그라지는 시기다. 이제 딸기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려 한다. “이제 맛없어서 딸기는 그만 사 먹어야겠다. 내년에 보자 딸기야.” 맛이 없으니 미련도 없다. 그동안 맛있게 잘 먹고선 이제 와서 끝물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정말 다들 몰라서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나 끝물 맞는데, 조금 있음 다시 맏물이야.” 딸기에게 끝물만 있는 게 아니다. 끝물 뒤에는 맏물이 있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 돌아오는 다음 차례에는 얼마나 더 맛있어지려고 파장하고 쉬러 들어간단 말이냐. 딸기는 끝맺음과 시작을 한 번도 미룬 적이 없다. 한 번도 맛없었던 적은 없다. 물론 365일 맛있었던 적도 없다. 계속 계속 달고 맛있어서 365일 늘 찾을 수 있는 맛이라면 너는 딸기가 아니라 설탕이겠지. 겨우내 최고의 맛을 보여주었다가 서서히 그 맛을 떨어뜨려 상대방이 알아서 물러나게 만든다. 끝물에 실망한 소비자들을 달래고 조금만 참으면 또 맛있게 돌아오겠다고 안심까지 시킨다. 딸기가 물러지고 밍밍해졌다고 울상하지 마라 소비자야.

  끝낼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명산이라도 계속해서 몇 날 며칠이고 올라갈 수만은 없다. 언젠가 정점을 찍었다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일중독, 성취 중독, 사랑 중독, 쇼핑중독, 게임중독. 계속하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다. 끝도 없이 치솟는 도파민을 계속해서 부여잡으려 하면 그땐 정말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끝물과 시작은 맞닿아있다. 겨울의 끝은 봄의 시작이다. 그리고 또 겨울이 오고, 여름의 끝은 가을의 시작이다. 그리고 또 가을은 온다. 끝내 다시 시작하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 먹을 시간이 온다. 화요일이 끝나면 수요일이다. 36살이 끝나면 37살이 시작된다. 임신이 끝나면 육아가 시작된다.       사람의 피부가 이렇게까지 늘어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배가 많이도 나왔었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소변은 또 얼마나 자주 마려운지 잠이 들 만하면 화장실을 가야 했다. 사람들은 내게 아기는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고 했다. 만삭이라 힘들다는 말을 두 번은 하지 못하게 막아선다. 힘들다고 그럼 영원히 배에 넣고 있을까. 임신의 종결은 육아의 시작이다. 하루 중 아기의 기세가 최고로 맹렬한 때는 자다 말고 한밤중에 깨었을 때다. 게다가 접종 열이 있거나 몸이 아픈 날에는 더욱 대단하다. 새벽 2시, 어떤 예행연습 없이 단번에 큰 소리로 울어버린다. 곤히 잠들어있던 내 몸통이 퍼뜩 세워진 머리 밑으로 줄줄이 딸려 나와 침대에서 일으켜진다. 언제 그랬냐든 듯 아기가 잠잠해지는 순간. 잠투정의 끝물이다. 눈을 감은 말간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속삭이게 된다. “엄마가 다시 재워줬지. 아기가 우는데 엄마가 잘 달랬지.” 아기가 실눈을 뜨고 엄마인 것을 확인하고 희미하게 웃는다. 너무 달콤한 순간이다. 내일 또 엄마한테만 보여줘. 폭풍같이 몰아치고 울어야 그 뒤에 말간 얼굴이 더 말갛고, 희미하게 지어 보이는 웃음이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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