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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마음 Feb 28. 2020

애증의 실버레이디

식물 저승사자.

부인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간 적잖이 사들이고, 적잖이 죽였다.


나처럼 식물을 좋아하지만 곧잘 죽이던 친구랑 (이제 이 친구는 어려운 식물도 제법 잘 키우는 능력자가 되었다. 물론 이 같은 능력자가 되기까지 떠나보낸 식물들의 이름을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둘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화훼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구매자들이라며 서로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우리 같이 식물을 사랑하지만 잘 못 키우는 구매자들이 있어야 계속 소비가 일어나고 농가도 소득이 생기는 게 아니겠냐며.

얘기 끝엔 혹시 일정 시기가 되면 식물이 죽도록, 오래 살지 못하는 종자로 개량해서 파는 게 아니냐며 화훼 산업의 음모론까지 들먹이며 쑥덕쑥덕거리곤 했다.

그리고 이 대화의 끝은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를 양재로 향하게 했다.  

화훼 농가의 살림살이마저 걱정하는 허세를 부리며 식물에 대한 나의 짝사랑, 또는 미저리 같은 집착스러운 사랑을 뽐내며 어김없이 새 화분을 사 온다.

이번에는 반드시, 꼭, 잘 키워보리라 다짐에 다짐을 더하고 키워본 적 없는 새로운 식물에 재차 도전하며 말이다.




새 식물들은 그럭저럭 적응하며 잘 지내는 듯싶다가도 나의 지나친 관심과 사랑에 과습으로 죽기 일쑤였다.

그리 물을 좋아한다는 셀렘과 해피트리도 과습으로 죽인 나는야, 식물 저승사자...

어느 날 해피트리의 가지에 나의 손길이 닿자마자 한 가지도 남김없이 모조리 우수수 떨어지던 그 처참한 모습을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해피트리의 희생을 통해 과습이 식물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다. 물론 희생 없는 깨달음이었다면 지금까지도 이리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진 않았을 텐데.)


결국 살아남는 애들은 싱고니움, 스파트필름 같은 정말이 초초초보자도 쉽게 키운다는 식물들이었고 (물을 바가지로 부어도 살아남을 식물인  같다),  이상은  되겠다며 각성하고 식물에 대해 적당히 무관심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부터 식물 키우는 실력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래, 뭐든 지나치면 되려 독인 게야!

물을 주고 싶어도 꾹 참고, 차라리 목말라 잎이 처질 때 주는 게 낫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더랬다.


그렇게 여러 식물들을 떠나보내고 개중에 몇몇 힘겨운 생존 싸움에서 살아남는 아이들도 생기면서 이제는 나도 좀 큰 화분을 키워보겠다며 호기롭게 재작년에 중품 크기의 실버레이디를 집에 들였다.

그전까지 고사리과를 키워본 적이 없었지만 뭐 그리 어렵겠냐며 덜컥 사 왔다.


그런데 아뿔싸...

친구의 조언이 맞았다.

고사리과는 어려운 식물이었다...

운전도 초보 딱지 살짝 뗄 때쯤 위험하듯, 나도 이제 좀 키울 줄 안다고 자만한 것이 화근이었다.


실버레이디는 집에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또 너무 물을 많이 줬나 싶어서 찔끔찔끔 물을 부어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분무기로 뿌려주었다.

그러나 잎은 더더욱 처지기 시작했고 나는 포기하는 마음으로 '아, 몰라!' 하며 그냥 물을 확 부어주었다.


웬걸.

살아났다.

그때는 너무 건조한 상태였던 것이다.

사장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라고 하셔서 과습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마음에 참고 참으며 줬건만...

그 시기엔 2, 3일엔 한 번씩 줘야 했던 상태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물 달라는 거였는데... 내가 미처 모르고 널 굶기고 있었구나...


한번 그렇게 맥을 못 추자 실버레이디는 계속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상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엇박자였다.

식물 고수들에게 배워보고자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나에게 해당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무척이나 잘 키운다. (나만... 왜... 대체... 왜...)

심지어 어떤 이는 키우기 손쉬운 식물로 실버레이디를 소개하고 있어서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왜죠?? 왜 쉽죠??)


한동안 부지런히 물을 줬더니 어느새 과습이라며 울부짖으며 잎을 새까맣게 태워댔고, 물 주는 주기를 길게 잡으면 여지없이 건조하다며 다시 한번 잎을 새카맣게 태워댔다. ㅠㅠ

흙에 손가락을 푹푹 찔러 넣어가며 그때그때 물 주기를 바꿔줘도 쉽지가 않다.

건조하건 과습이건 간에 잎에 나타나는 증상이 똑같으니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 말리는 가을, 겨울이 지났다.

초봄이 되자 얼마 남지 않은 잎마저 모조리 떨궈냈다.

하아... 결국... 또...

라는 생각도 잠시!


어느 볕 좋은 날 갑자기 엄청난 생장력으로 열댓 장의 잎을 마구 뿜어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

만물이 성장하는 시기가 봄이라더니 너도 동참하는 게냐??!!

내 자리 내놔~~ 하는 듯 먼저 자리 잡은 잎들 사이를 비집고 새잎이 정신없이 계속 나왔다. 이래도 되나 싶게 매일 아침 여지없이 새잎이 뾰~롱 하고 나와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실버레이디...

재작년보다 잎 크기는 많이 작아졌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에 기특하다 싶었다.                                                                                                                                                                         

폭풍성장이 뭔지 보여주겠어!

그러다 여름이 지나면서 또 사달이 났다.

한 잎, 두 잎 새까맣게 변하더니 결국 잎이 모조리 새까맣게 타들어가버렸다...

병든 잎을 모두 잘라내고 많이 우울해졌다.

에휴... 올겨울은 못나고 이렇게 또 가는구나...

키운 지 1년이 지나면서 이번에는 정말 사망진단을 내려야 하나 싶었다. 결국 또 손쉬운 스파트필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나는 식물계 똥손인가 좌절하며 '그래, 식물 저승사자 어디 가랴' 싶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인지??

이 아이가 끝까지 힘을 낸다.

겨울을 앞두고서 새순 다섯 잎을 봉긋 세워냈다.

지금??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영차! 나예요, 실버레이디~

그래... 이런 순간들이지...

이런 모습에 식물 키우기를 그만둘 수가 없지...


이리도 연약해 보이는데 그 속에서는 누구보다 강인한 생명을 품고 숨 고르기를 하다 일순간 내뿜어낸다.

식물을 키우면서 매번 경이롭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엄청난 생명력이다.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눈물이 핑 돌만큼 대단하다 싶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관리한답시고 오히려 죽음의 길로 안내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이런... 식물 저승사자 같으니라고...

여리여리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뻗어 나오는 중!
좀 더 힘내서 자라자!

어렵게, 정말 어렵게 피워낸 잎 다섯 장을 부디 무탈하게 올 겨우내 지켜낼 수 있길... 제발 잘 버텨주길...

나도 이제 식물들을 생명의 길로만 안내하고 싶다~~~!!



우리 서로 포기하지 말자!!

내가 진짜 이번엔 잘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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