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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da Oct 04. 2019

왜 내 아들 딸만 일해?

며느리와 딸의 노동에 대한 시어머니의 이중성

“엄마랑 누나 네가 같이 여행가자네..”

“꼭 가야 해? 난 불편한데...”

“하룻밤이니까 그냥 가자.”     


더 이상 아니 가겠노라고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명절마다 시댁에서 자는 것조차, 그날 밤은 거의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는 나에게,

따로 여행까지 가자는 건 또 하룻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우라는 고문과 같은 주문이었으나

달리 안 갈 수 있는 묘수도 없었다.      



   

아직 저녁 먹기가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펜션의 드넓은 마당에서 간단히 고기를 몇 점 구워,

다들 술 한잔씩을 나눠 마시며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불편함 때문에 오는 게 망설여졌던 여행이었지만,  

모처럼의 여유 있는 시간과 장작불에 구워 먹는 고기 맛에 이것도 나름 괜찮네라는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나도 시댁 식구들의 테두리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밥 먹어야겠다. 고기만 먹으니까 밥 먹고 싶네..”     


누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짐작으로는 밥돌이인 내 남편이 그랬을 듯싶다.

고기 먹던 걸 대충 정리하고 서둘러 들어온 펜션 안에서 우리는 각자 저녁 준비에 분주했다.

시누이는 구워 먹다 남은 고기와 함께 먹을 쌈 채소를 더 씻고 있었고,

나의 남의 편인 남편은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지금이야 내가 요리를 더 잘하지만,

신혼이었던 그 당시는 자취 생활을 오래 했던 그가 요리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나는 밥이 거의 다 됐다는 압력밥솥의 치이칙~ 신호를 들으며 밥상에 수저를 놓고 있었고,

시누이 남편은 때마침 감기로 고생하던 딸내미의 약을 타 먹이고 있었다.      

시작은 내키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달랑 하루만 참으면 안락한 나의 집에서 쉴 수 있다며 최면을 걸고 있는 나에게

그 순간 갑자기, 시장통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가 악을~ 악을 쓰며 갑자기 화를 냈던 것이다.


“왜 내 아들, 딸만 일해? 니들은 왜 안 해?”         


그 버럭질을 듣는 순간 난 멍 해졌다.

내 아들, 딸만? 잠시 난 착각을 했었던 것이다.      

내가 이 공간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가족으로 편입하고 있었다는 그 허망한 착각을.        


그리고 곧바로 생각했다.     

내 아들 딸과, 니들이라면, 니들이라는 건 나와 시누이 남편을 이야기하는 건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휴~ 엄마는... 애 약 먹이고 있잖아~ 뭘 안 해?”                    


시누이는 한 마디라도 거드는데     

나의 남의 편 님인 남편은 그저 자신의 엄마 버럭질에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물론 자신의 엄마 성격을 아니까 그저 대꾸를 안 하는 것이     

가장 빨리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현명함이라고 판단했을 터다.     

하지만 난 그 당시 신혼이었기에 그 상황이 서운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시어머니의 억지스러운 버럭질 이후,  난 반쯤 멍한 상태였고, 어이는 십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난 수저를 놓으며 밥상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댁 사위는 아이를 챙기고 있었는데     

무엇을 더 해야지 버럭질을 안 했다는 건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고 그 댁 따님이 내가 명절이면 홀로 부쳐내는 산더미 같은 전을     

이 펜션에서 부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쌈채소나 씻고 있었는데...    

하물며 그 댁 아드님인 내 남편도 그저 된장찌개 하나 끓여 내려한 것뿐인데.    


하필 그게 따님은 싱크대 개수대 앞이었고, 아드님은 개수대 옆 가스레인지 앞이었긴 했지만...     

사위도 며느리인 나도 앉아서 밤하늘의 별을 헤고 있지는 않았던 터라     

시어머니의 그 버럭질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화가 나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가 일을 안 한 건 무엇이었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꾸역꾸역 참으며 상을 차렸다.     

하지만 나의 멘털이 무너지는 건, 몸의 이상 신호로 나타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는다는 건     

그 자리에서 토해버릴 수도 있겠다는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저는 속이 안 좋아서요. 먼저 드세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 밥을 먹으려 던 시댁 식구들에게 내가 생각하기엔 최대한 공손하게 한 마디 남기고 -사실 이건 내 기억일 뿐, 툭 내뱉고 나왔을지도-    

바람을 쐬러 펜션 마당으로 나왔다.         

화병이 날 것 같은 이 적응 안 되는 시월드의 분위기를 애써 삭히며 마당을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아까의 그 버럭질보다 더 거센 옥타브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 너! 어디서 밥상 분위기 다 흐려 놓고 나가?

  한 소리 들었다고 니 맘대로야?”                    


저 멀리서 얼마나 감정이 격했는지,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시어머니가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 장면 역시 김치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나에겐 슬로 모션의 이미지로 아직도 각인돼 있다.                 

오래전, 레슬링 하는 격한 남자들의 모습과 달리

끈적한 음악이 깔리면서 현실의 왜곡됨을 보여 준 바로 그 광고처럼...    

나에게는 지극히 비극이었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블랙 코미디쯤 되는 그 날 상황은....        


정면에서 시어머니가 맨발 투혼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고...      

나와 시어머니와의 중간 거리쯤에 있었던 중년의 펜션 안주인도 다급히 나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여인이 앞 다퉈 나를 향해서 달려오는 그 시각적 신호가

지금의 나에게 왜 코믹하게 입력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시어머니가 나의 머리채를 힘껏 움켜잡으려 손바닥을 쫘악 펴며 허우적거리던 그 찰나의 순간에...    

펜션 아주머니가 온몸을 던져, 시어머니를 껴안으며 말렸고.     

난 운이 좋았던 건지, 여행 온 타인들 앞에서 머리채를 휘어 잡히는 망신은 면했다.                 

시어머니의 돌발적인 그 행동을 뒤늦게 인지한 가족들은, 다급하게 달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기어이 나의 머리채를 잡지 못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시어머니는     

남편의 품 안에서도 여전히 나를 향해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식구들끼리 그 헛웃음 나오는 몸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반응이 지금 생각해 봐도 뜬금없다. 분노도 하지 않았고 겁 많은 내가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남의 일 인양, 어쩌면 애써 내 일이 아니라고 부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펜션을 나서서 무작정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마셨던 술기운에 홀로 걸을 용기가 생겼을 거라 짐작한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길치에 겁도 많았던 내가 지갑도 없이, 돈도 있었을 리 만무하고,     

더구나 시골이라 가로등은 물론 없었고 서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이 어둡고 또 어두웠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 보니 일 차선 국도가 나왔고 갓길조차 없는 그 길을 걷다 보니 허름한 카페가 하나 보였다.


    

깊은 산속에서 나그네가 불빛을 찾은 것 마냥 난 홀린 듯 돈도 없이 그 카페로 들어갔고,     

곧바로 맥주를 시키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상에서 그렇게 맛있었던 맥주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싶다.                     

그렇게 나의 시댁과의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것도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어렵게 나를 찾아낸 남편은 차에 나를 태우더니 말없이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절대 묻지 않았다. 그곳 펜션의 상황은 어떠했냐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직도 내가 그 기억을 못 잊는 것은,     

머리채를 잡힐 뻔 한 그 위기의 상황이 억울했던 건 아니었던 듯하다.       

 

그저 명절이나 제사 때도 예외 없이, 꼬박 밤을 새우고 방송을 하고 아침에 들어왔어도     

차례 음식은 당연히 해야 했던 며느리의 의무와 그 노동력의 가치가      

내 아들, 딸이 가족이 함께 먹을 음식을 해 내는 그 노동력과는 태생부터 달랐다는...      

그 불합리함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나 또한 우리 집에서는 소중한 딸이었으며, 시어머니의 딸 또한 어느 집에서는 며느리인 것을...                


내가 내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좀 서툴고 네 마음을 모를 때가 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미안하고 마음 상하지 마~”                                 


아마도 나의 시어머니도 그때는 시어머니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내 딸과 아들의

노동에 대한 이중적 잣대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흉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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