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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소나 Jul 15. 2020

친정엄마가 가져온 판도라의 상자

엄마가 진화하면 친정엄마가 되는 걸까

결혼하고 삼 년은 있어야 친정집에서 내 짐이 다 빠진다더니. 요즘 집 정리를 하고 있는 엄마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을 가져온다. 엊그제는 여고생 때 산 19금  BL만화책 -심지어 제목도 <절정>, 차마 펼쳐보지도 못했다-을 가져와서 김서방 서재에 꽂아두더니 오늘은 고3 때 사진을 가져왔다. 틴박스로 하나 가득.

 "이걸 왜 가져왔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는데 옆에 있던 친정아빠가 "거봐"라며 엄마를 몰자 "아니야 잘했어 고마워"로 수습했다.

 꼬라지가 가관이었다. 그때 몸무게가 70kg쯤 나갔으니까 만삭 때보다 덩치가 컸던 셈이다. 튀는 걸 좋아해서 성냥머리같이 벌건 털실내화에 사복 니트를 꼭 챙겨 입었다. 그 와중에 표은 참 해맑다. 뒤로 갈수록 정말 잊고 있던 사진들이 나왔는데 필카 인덱스도 섞여있었다.

 사진은 없고 작게 썸네일만 남아있는 건데, 그중에 외할머니 얼굴이 보였다. 요양병원에 계셨을 때 뵈러 갔다가 찍은 것 같다. 병원 옷을 입고 있는 백발의 할머니. 사진을 보니 어렴풋이 그 날이 생각났다. 할머니한테 간다길래 나는 얼른 필카를 챙겼고 엄마는 그걸 뭐하러 가져가냐고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외갓집에 관련해서는 항상 그렇게 박했다.

  할머니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그 하나 있는 딸 첫 애를 8월 말에 낳았는데, 하필 그 해에 태풍이 늦게 와서 다 익은 벼가 드러누워버렸다. 당장 건져서 세워놓지 않으면 다 키워놓은 노란 낱알이 물에 잠겨 검게 썩을 판이었다. 할머니는 정신없이 논에 나가 허리 한번 못 일했고 일했고 일했다.  딸은 자기가 낳은 아기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남편도 엄마도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고 한다. 며칠 뒤 찾아온 할머니에게 딸은 참 빨리도왔다고 불퉁거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딸에게 고생했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꼬깃한 봉투만 찔러주고 가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건조하게 하는 친정엄마의 눈 참 깊었다.

  친정엄마가 짐 정리를 더 하다 보면 인덱스에 있던 그 사진도 나올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와 동생이 나란히 찍혀있는 사진 하나. 그리고 밝은 벽을 등지고 희미하게 웃고 계신 할머니 사진 하나. 그 두장의 사진을 엄마가 꼭 발견하기를 바라며 나는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았다. 내일 친정엄마가 오면 사진을 꼭 찍어둬야지 애기 사진 말고 내 엄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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