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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Feb 14. 2024

아들만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꿈이 허망해지는 날이었다

지난 설 연휴에 온 가족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12살, 8살 아들의 극장 첫 경험이다. 극도로 갈등을 싫어하는 첫째가 대부분의 스토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도 큰 소리도 싫어하는 아이에게 극장은 굳이 돈 내고 찾아갈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12살쯤 됐으니 극장 경험 한 번쯤 있어야 되지 않나 싶기도 했고, 어둡고 큰 소리가 나는 곳에서 갈등을 보는 것도 연습이겠거니 싶어 극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이왕이면 영화에서 싸우는 건 안 나왔으면 좋겠어."라고 했지만, "갈등이 없는 영화는 없어. 갈등이 없는 현실이란 없거든. 갈등 없이 이어지는 스토리는 지루해서 흥행할 수가 없어."라고 받아쳤다.


우리가 고른 영화는 <웡카>였다. 갈등과 다툼과 좌절과 극복이 뒤섞여 있을 것이 뻔한 영화. 하늘을 날 수 있는 초콜릿이 나온다는 말로 아이를 설득했다. 영화는 희망 가득한 웡카의 소망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시궁창에 빠지고 거기에서 누들을 만난다. 누들이 조력자가 된 첫날, 둘은 동물원에서 기린의 젖을 짜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한 명은 희망을, 한 명은 빠져나갈 수 없는 막막함을 노래하는 영상에서 울컥 오래된 감정이 차올랐다. 웡카는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노래하는데, 누들은 그게 가능할 리 없다는 체념의 마음을 노래한다. 


체념, 다른 이들에게는 가능하지만 나에게는 가능하지 않을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이 절절하던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 


사진: Unsplash의tabitha turner


"오빠, 나는 나한테 아들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표정 없이, 감정이 없는 듯 이 말을 툭 내뱉었던 날의 내가 그랬다. 마음속 부글거리는 소용돌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힘든 마음은 내놓고 싶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하지만 뾰족하게 말을 이어갔다. 


"ㅇㅇ가 SNS에 글을 썼더라고. 알지? 그 친구 나랑 대학동기인 데다가 입사 동기이기도 한 거. 딸을 둘 낳았고 이번에 복직했거든. 연년생 아이 둘을 놓고 회사로 돌아가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자신의 모습이 딸들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대. 내가 딸들의 미래라고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다고. 나는 딸이 없어서 쉽게 그만둔 걸까?"


아니. 쉬웠던 적 없다. 그만두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나의 퇴사는 너무 쉬운 선택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들이 허공으로 흩어졌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버티는 노력을 그만둔 나만 선명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래 계획이 확실했고, 대학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만큼 열심히 했다. 입사한 후에도 마찬가지. 중간에 퇴사하면 억울할 만큼 나를 갈아 넣었다. 오죽하면 입사동기가 그랬다. 동기 중에 딱 한 사람이 임원이 된다면 그건 너일 거라고. (아, 물론 능력과는 별개로....)


"오빠, 있잖아. 나는 내가 아들뿐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에게 만약 딸이 있었다면 무엇이든 꿈꾸라고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그렇게 꿈을 꿨는데 결국 다 그만두고 엄마만 하고 있잖아? 나는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걸까? 목적지가 퇴사는 아니었거든. 엄마가 되었다고 일을 그만두는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애쓴 게 아니거든. 대학 때 너무 분명하게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어. 그때는 그게 이해가 안 됐어. 심지어 학점도 좋아서 영문학 전공을 딴 친구였어. 그래서 억울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더라고.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니까 자기 아이를 잘 가르치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요즘 자꾸 그 친구 생각이 나. 그때 나도 비슷한 꿈을 꿨다면 지금 덜 억울했을까? 어쩌면 그 친구가 제일 현명했던 건지도 몰라."


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무슨 답답한 소린가 싶을 거라는 걸. 하지만 당시의 나는 충분히 좌절한 상태였다. 고백하자면 그간 나는 큰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소소한 실패야 많았지만 큰 줄기들은 어긋난 적이 없다. 그러니 엄마가 되고 나서 한 퇴사가 나에게는 너무 큰 좌절이었던 거다. 어떻게 헤어 나와야 할지 모를 구덩이.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나에게 "난 너 같은 애가 제일 싫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는."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온실 속의 화초'란 어떤 사람일까 고민했었다. 서울로 대학을 왔더니, 그것도 어문계열로 입학하고 보니, 외고 출신, 해외유학파 출신, 서울 학군지 출신들이 득실득실해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지방 고등학교 1등 따위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감이 팍 와서 조금은 얼어있을 때였다. 아빠는 월급쟁이. 부유하지도  빈곤하지도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이올린이 너무 배우고 싶었지만, 연습용 바이올린 하나 값이면 1년 치 학습지를 살 수 있어서 득실을 따져 학습지를 선택했다. 족집게 과외, 유명학원. 그런 거 대신 독서실에 틀어박혀 하루에 문제집을 두세 권씩 풀었다. 물론 그땐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나는 위축을 경험했다. 내가 '온실 속의 화초'라서 위축되는 걸까? 그게 아니라서 위축되는 걸까? 그게 당시 나의 질문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퇴사를 하고서야 알았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 그까짓 퇴사 앞에서 절망하는 화초. 특별히 부유하지도 빈곤하지도 않게 무난하게 살아온 삶이 온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날 가장 좌절스럽게 한 건 단지 상황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내가 제일 좌절스러운 건 내가 원했다는 거야. 내가 그럴 줄 몰랐는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고 그걸 선택한 게 나야. 아이와 함께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나라는 사람이 했다고. 모성이라는 게 생겨버렸어.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이를 낳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왜 여성도 꿈을 꾸는 세상이 와버린 거야?"


물론 이 말을 하던 내가 여성이 꿈을 꾸는 세상이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때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동등하게 했어야지. 왜 여자만 애를 낳게 한거야. 왜. 왜. 왜. 똑같이 꿈을 꿀 수 있는 똑같은 상황을 줬어야 공평한거잖아.


"나 같은 사람은 과거에 태어났으면 부대낌이 덜 했을까? 있잖아, 이런 나는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 아이랑 함께 하는 시간을 선택할 거 같단 말이야.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럴 거 같단 말이야. 내가 변해 버린 거라서 누굴 원망할 수도 없잖아.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나에겐 딸이 없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무엇이든 꿈꾸라고 말할 수 없을 거 같아."


그때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났다. 퇴사 후 몇 개월 그렇게 방황하다가 내 자리를 찾은 나는 다시 나에게 집중했다. 아이들이 좋지만 나를 버리는 나는 용납할 수 없어서 저런 말을 주워 삼키던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도 내 일을 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 중이다. 그날의 내 말속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숨어있는지 이제는 안다. 다행이다. 내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버둥거리며 나아왔으니 참 다행이다.


물론 지금은 그때처럼 좌절스럽지 않다. 아직 엔딩이 오지 않았지만, 만약 지금 한 시즌을 끊는다면 이번 시즌은 해피엔딩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감정은 쓰나미 같아서, 떠오를 때마다 숨이 턱 막힌다. 가슴에서 차오르기 시작한 무언가가 목까지 올라오면 숨이 찬다. '그때의 너는 참 미숙했구나' 여기면서도 이해한다. 그런 좌절마저 없었다면, 이전의 내가 더 서글펐을 테니까. 끊어져버린 시절에 대한 애도가 필요했다. 지금의 나로 건너오려면 필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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