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그린 Mar 11. 2024

비로소 글자가 되어도 부족한 이야기

언제나 공상에 빠져있었지

 아이가 피츄(피카추로 진화하기 전 아기 포켓몬)에 푹 빠졌을 때는 혼자서 한참 동안 "백만 볼트! 피카 피카! 츠즈즈즈즈즈즈즈..."하고 놀았다. 티니핑에 빠진 요즘은 또 끝없는 티니핑 상황극. '혼자 노는데 같이 할까? 나도 어릴 때는 인형놀이 장인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반짝하고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을 넘긴 나는 아이의 놀이 흐름이 깨지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방법을 택한다. 놀이에 몰입한 모습이 귀엽다고 사진을 찰칵 찍다가는 평화로운 시간이 끝나버리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고요한 시간에 이러고 있기로 한다. 메모장을 켜서 글을 쓰고, 읽던 책을 읽기로.

소중한 너의 티니핑


 어릴 때는 늘 심심했다. 미취학 아동 시기의 기억은 두어 가지 극적인 사건에 가려져 별로 떠오르는 것도 없지만, 단편적으로 남은 기억은 이런 거다. 숨은 그림 찾기와 점선 긋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결국은 재래식 화장실 앞을 굴러다니 학습지의 알록달록한 색깔 같은 것. 대구에 사는 이모가 보내준 아이템풀 학습지(이걸 안다면 그대는 분명 내 또래이겠고,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눈높이 같은 겁니다)가 재미있었지만, 기다려도 새로운 학습지는 오지 않았고, 집에 내가 읽을 종이는 신문뿐이었다. 왜 이렇게 심심하지?라고 느꼈던 순간. 그때는 슈퍼도 없는 시골에 살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기억이 선명해지는 할머니와의 대구 살이 시절에는 정말이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7명 대가족이 살던 시골집에서는 배울 기회조차 없는 고독이 단칸방에 있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메리야스 공장에 간 할머니가 올 때까지 혼자였다. 혼자서 무얼 한단 말인가? 전학 온 학교에는 반이 10개가 넘었지만 친구는 아직 생기지 않았다.


단칸방에서 라면을 깨 먹다가 라면수프에 사과를 찍어먹으면서 엄마가 시외버스정류장 근처에서 헤어질 때 사준 책 <파랑새>를 읽고 또 읽었다. 여러 단편이 실린 그 책에는 파랑새 외에도 알퐁스 도데의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와 모파상의 <물 위에서>가 실려있었는데, 둘 다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파랑새와 함께 실려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특히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물 위에서>는 서양판 물귀신 이야기 같은 거라 전설의 고향을 보는 느낌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가슴을 졸여가며 읽었다.


오늘까지도 스토리가 떠오르는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 이야기를 해볼까. 제목 그대로인 남자는 자신이 가진 황금 두뇌를 잘라 부모와 여인에게 바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꽃과 보석을 바치느라 그의 황금 뇌는 점점 고갈되고, 끝없는 욕심을 부리던 아내는 죽는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남자는 거의 남지 않은 황금 부스러기를 긁어내어 상인에게 내민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기억이 정확하진 않겠지만, 10살의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사나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손끝을 떨며 손톱에 끼인 피와 살점이 섞인 황금 부스러기를 내미는 쓰러져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지던지...

"여기... 여기... 황금이 있...소..." 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해서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황급히 책장을 덮고(다음에 펼치면 라면 스프가 끼어있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보면 화장실 입구 같은 단칸방 문을 닫고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주인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주인집 언니도 안 보이고, 2층집 언니도 안 보이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 본다. 머릿속으로 뭐라도 떠올려본다. 할머니와 월화드라마에서 본 비련의 여주인공의 대사를 읊어본다. 아무튼 나는 죽을병에 걸린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남주인공 앞에서 징징대지 않고 분위기 잡는 말을 할 수 있다. 달관한 표정과 체념한 말투로 "이제 다 소용없어." 마론인형 같은 배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따라 하지만 연기도 서울말도 모두 어설프다. 몰입해 보려 노력해도 안 된다. 이러고 앉아있는 자신이 우스워서 킥킥 웃고, 누가 봤을까 주변을 둘러본다. 옆집 앞집 골목길이 조용하다. 볕이 따뜻한 계단 참에 앉아 이런저런 공상에 빠진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시계도 없지만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는 건 잘 알겠다. 지루함이 넘쳐흐를 때쯤 큰고모의 의상실에 간다. 한 블록만 걸어내려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열려있는 큰고모의 의상실. 플라타너스가 있고 마름모 모양 회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이 규칙적으로 깔린 길을 따라 걷는다. 금세 의상실 앞이다. 오후 시간에 고모는 자주 자리를 비운다. 안쪽 집에 들어가서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동네 어딘가에 일을 보러 갈 때도 많다. 가게를 오래 비우지는 않기 때문에 딱히 잠그지도 않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경쾌한 라디오 방송 소리에 다리미 호스에서 나는 칙칙 소리가 섞여 들린다. 나는 새로 들어온 옷감 견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옛날 가요를 흥얼거린다.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돌아올 줄 모르고..” 너무 자주 들어서 외워버린, 그러나 제목은 모르는 “나이는 십팔 세, 이름은 순이.”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한다. 열 살이 따라 부르기에는 좀 그런가? 18살이면 사랑을 하는 건가?(찾아보니 나훈아의 ‘18세 순이’였다)


한낮의 라디오는 언제나 유쾌하고 신명 난다. 싱글벙글 쇼와 여성시대를 들으며 복잡한 의상실 안을 돌아다니고, 가게에 딸린 방에 들어가 사촌언니의 헤어스프레이를 머리에 칙칙 뿌려본다. 시간이 제법 흘러도 고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서문시장 단춧구멍 가게에 간 모양. 슬슬 지루해지면 밖으로 나온다. 길 건너에는 미용실, 골목 뒤에는 슈퍼와 고물상이 있는 길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왔던 길로 돌아온다. 마름모꼴의 붉은 블록만 밟으며 깡충깡충 뛰고 발걸음을 센다. 백까지 세고 다시 하나, 둘.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나훈아의 ‘잡초’였다. 고모는 나훈아 팬이었나)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져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오늘따라 길에도 사람이 없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아직도 해가 쨍쨍. 이제 정말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할 일 없이 고모집에서 놀다가 사촌 언니의 스프레이를 한 통 다 쓰고, 사촌 오빠의 안경테를 망가뜨리고, 바이오리듬을 알려주는 700번 전화 나부랭이까지 걸어서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게 되자 할머니는 아빠와 의논해 나를 학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소리치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도망친 속셈학원에 한 달, 손등을 탁탁 때리는 피아노 학원 한 달 다니고 말았지만.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자주 노는 친구 무리가 생겨서 학교 운동장이나 옆동네에서 오래오래 놀았다. 친구들과는 학교 전설과 괴담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땅따먹기와 술래잡기, 종이딱지도 열심히 했다. 실컷 놀고 돌아오는 길에는 또 혼자 중얼중얼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그 시절의 내 공상과 나는 사이가 괜찮았다. 공상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미련 없이 현실로 달려갔다. ‘누가 날 안 불러주나’하는 마음으로 귀를 연 채, 건성으로 상상의 놀이를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성격은 복잡해졌고 내 상상의 세계는 무지에서 비롯한 순수의 시기를 지나 뻔한 거짓말을 지어내던 관종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10대 중후반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지만, 정신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음침한 어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공상의 세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씩 복기하면 그 시절 내 공상은 외로움과 불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달래려고 만든 구석지고 음습한 다락방 같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 덧붙이자면, 이것도 조만간 용기를 내서 써낼 수 있겠지. 하는 정도로 남겨두자.


나는 내가 망상(이런 단어는 몰랐지만)에 빠진 걸까 두려워하던 아이였다. 내 상상이 구름 의자와 무지개다리 귀여운 수준의 상상화가 아니라 미친 사람의 공상일까 봐. 점점 더 미칠까 봐 두려웠다. 글자가 되지 못해서였을까? 글자로 남았다면 그 불안은 줄어들었을까? 나는 공상에 빠지다가 그 세계를 부정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생긴 내 감정을 믿지 못하는 부작용도 깊어졌다. 30년이 지나서야 나는 제 발로 현실이 아닌 세계로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내가 써내는 세상은 모두 과거에서 왔지만, 기록은 현재에 머물러 있으니 글 속 세상은 현실과는 다르다. 이만큼 멀어져서 들여다보면 그저 조그마하고 조금은 쓸쓸하지만 오만색으로 물들어있는 그 세계.


주말 오전이면 아이의 티니핑과 피츄 상황극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현란한 애니메이션 이미지의 세계에서 아이의 상상은 내달리고 뛰어오르고 고꾸라지고 다시 달려 나간다. 나는 살금살금 식탁을 정리하고 안방 바닥의 먼지를 치운다. 샤워를 할까 싶어 옷을 벗는 순간 우렁찬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엄마? 엄마!”

“어! 엄마 안방에 있어! 씻고 나올게!”

“응!”

끊어졌다 이어지는 티니핑 놀이를 들으며 갑자기 깨닫는다. 나는 계속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서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 웃는 그런 세계. ‘나 여기 있어. 걱정 말고 놀아.’ 해주는 다정한 세계.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나의 일기장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