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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r 01. 2022

그 시절 나의 일기장에는

마음에 들고 싶은 욕심이 먼저

  년 가을에 쓴 일기



나는 학교 생활이 인생의 전부였던 어린이로서 모든 수업과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학업 성적도 좋았고(열성적이어도 체육은 안 됨) 학교 생활도 즐거웠다. 환경미화나 조별과제를 할 때도 열심이었지만 특히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다. 숙제가 하기 싫고 일기를 쓰기 싫은 날에는 짜증을 내고 울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일단은 열심히 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국민학교였지만)는 일기장 검사에 열성이었는데 90년대의 초등학교가 다 그렇다고 해도 좀 심한 편이었다. 일기를 써오지 않으면 벌을 받거나 남아서 쓰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4, 5학년 때쯤에는 일기의 주제를 정해준 대로 써와야 하는 기간도 제법 길었다. 아마도 '봉사, 협동, 지혜, 건강' 뭐 이런 건전한 주제를 정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 주제에 맞게 일기를 쓰라고 했다.


 우리 반에서 맡아서 하는 화단 청소를 하다가 친구들과 바짝 마른 똥덩어리를 발견하고 깔깔 웃었던 날. 그리고 그날 그걸 일기로 쓰면서 봉사와 협동의 주제를 표현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열심히 쓰라는 대로 일기를 써서 일기를 잘 쓰는 어린이에게 주는 상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보람이었던가.

 일기를 쓰며 제일 좋았던 것은 선생님이 댓글을 달아주는 거였다. 매일 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관심 있게 읽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그때는 볼펜 글씨를 발견한 날이면 그저 선생님과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는 특별한 아이가 된 듯한 느낌에 기뻐했다. 내가 우리 반에서 주제에 맞는 일기를 열심히 쓰기로 선생님과 약속한 몇 명의 아이들 중 하나였으니 선생님도 최선을 다해 나의 일기 쓰기를 독려해 준 거였겠지만.
3학년 때 처음으로 일기장으로 상을 받았고, 4학년 담임 선생님도 일기를 잘 봐주었고(나중에 엄마로부터 촌지를 요구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뒤늦게 상처받았다), 5학년 담임 선생님이 특히 내가 글쓰기 하는 걸 많이 응원해주었다(나중에는 내가 자꾸 귀찮게 한다고 느끼신 듯했지만).

 4가지 덕목에 맞는 일기를 써야 하는 과제는 6학년부터 없어졌다. 그래도 일기 쓰기는 매일 해야 하는 숙제였고 나는 열심히 일기를 썼다. 쓰기 싫은 날에는 허접한 동시나 독후감을 써서 내고 너무 시시했던 일상에는 가짜 친구 이야기(일기장에 민지라는 가상의 친구가 자주 등장했다)를 꾸며 쓰기도 하면서.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주 가끔씩 멋진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나는 그 댓글을 더 자주 받고 싶어서 어느 날 용기를 내보았다. 일기장 아랫부분에다가 이렇게 쓴 것이다.
ㅡ선생님, 제 일기에 평을 써주세요. 저는 그게 좋아요.라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뭐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냐면
ㅡ일기를 평을 하는 게 아니지요.


뼈를 때리는 선생님의 빨간 글씨!

 아, 두근대는 마음으로 일기장을 펼쳐보고는 귀까지 화끈하도록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에 대한 서운함, 그런 말을 쓰지 않았으면 했던 후회, 신나서 하던 말이 끊긴 듯한 민망함과 부끄러움까지. 쳇! 이제 내가 일기 열심히 쓰나 봐라. 하며 혼자 씩씩대기까지 했으니 다시 생각해도 참 우습다.


 그렇지만 6학년 담임선생님이 그 학교에서 만난 제일 좋은 선생님었다. 촌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부당한 심부름을 시키거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나쁜 짓 안 하는 게 좋은 선생님인가 싶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다정하게 관심을 주던 선생님은 그만큼 차별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고, 내가 받은 관심들은 어떤 대가가 있는 애정이었음을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쓰던 다이어리와 교환일기까지 수십 권의 일기장을 다 버리고도 6학년 때의 일기장을 지금까지 간직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괜찮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반성의 시간 같은 것이 일기장 곳곳에 담겨 있어서이다. 오로지 선생님의 관심과 상 받기에 집착하느라 쓴 일기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다.



 작년 8월에 한 글쓰기 캠프의 글을 돌아보고 떠오른 일기장에 대한 기억들. 글쓰기 캠프의 리더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쓰려고 마음먹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글쓰기에 대한 마음보다 커지면서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것,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아직 어린아이구나. 하며 생각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마음에 들고 싶은 욕심이 자기 검열로 이어져서 글쓰기가 더 이상 자유롭지 않게 되는구나. 뭐, 이런저런 생각들.

 그래도 글쓰기를 하며 주고받은 댓글과 아름다운 인연들에 감사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알겠다. 나를 위해 쓰는 일기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용은 좋지만 글씨 모양이 엉망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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