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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Feb 24. 2022

하기 싫게 하는 마법의 한 마디

이것만 고쳐 오면 상을 줄게



글쓰기 모임 멤버 한 분이 올린 글을 읽었다.

중학교 때 백일장에 낼 시를 써냈더니 선생님이 마지막 연을 고치게 했고, 고친 시로 동상을 받았지만 그 시가 더 이상 나의 시가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는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 거의 똑같은 일이 있었다. 5학년 때에 교내 글짓기 대회에 산문을 제출했다. 나는 정해진 글 주제 몇 가지 중에서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골라서 계절마다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해 썼다.

글을 낸 후에 학교 문집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글을 고쳐쓰라고 해서 한 번 더 써갔더니 나를 빤히 보며 무언가를 보고 베낀 것이 아니냐고 했다.


 당황스럽고 억울해서 아니라고 했는데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겨울에는 노을 지는 하늘에 기러기가 줄지어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라고 쓴 것을 보고 자꾸 뭔가를 보고 따라 쓴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린 네가 어디서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자꾸 다그치니 나는 점점 더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니 선생님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어디 책에서 비슷한 걸 본 듯하다."라고 대답해버렸다. 그제야 선생님은 나를 놓아주면서 또 글을 고쳐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에게 엉엉 울면서 말했다. 나는 베끼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자꾸만 베꼈다고 한다고. 너무너무 억울하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학교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학교에 갔던 것인지, 전화를 했던 것인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더 이상 베낀 글이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선생님이 또다시 고쳐서 써오라고 했으니 울면서도 새로 또 글을 썼다. 누구라도 절대 베꼈다는 말은 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한번 고친 글을 내고 왔을 때는 교감 선생님이 불러 교무실에 가야 했다. 교감선생님은 "담벼락에 선 해바라기가 부끄러워하는 총각 같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했냐며 칭찬을 해주었다. 앞으로도 글을 많이 쓰라고 하면서 어깨를 툭툭 다독여주기도 했다. 주위에 서 있던 낯 모르는 선생님들도 웃고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말은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의 나에게는 교감 선생님의 말이 이렇게 느껴졌다.

'문집 담당 선생님이 의심한 것처럼 교장 선생님도 내 글을 의심하는구나. 또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앞으로는 절대 베끼지 말고 쓰라는 경고인가? 아니면 저렇게 웃는 얼굴로 나를 놀리는 건가?'


몇 달 후학교 문집이 나왔고 한 번 고쳤던 글인지, 두 번째 고친 글인지, 아니면 처음 낸 글인지... 내 글도 거기 실렸다. 딱 한 페이지 짜리 글이었지만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문집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나는 싫었다. 문집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무안하고 억울했다. 나를 몰아세운 선생님을 찾아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4학년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도와준 그림을 대회에 내지도 않았어요. 내가 그린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멋졌지만, 내 그림이 아니니까 내지 않았어요. 그날 아침에 학교에 가져왔지만 낼 수 없었어요. 내가 그린 게 아니니까 안 냈다고요. 선생님이 뭔데 내 글을 의심해요? 내가 남의 글을 베껴서 냈다고요? 무슨 글인데요? 어디에서 읽었냐고요!"


할머니가  잊어버릴 때쯤, 나는 결국 문집을 찢어버렸다. 먼저 내 글이 쓰인 페이지를 찢어내서 갈기갈기 찢고 대충 몇 번 더 책을 찢어서 쓰레기로 내놓았다. 거지 같은 문집, 거지 같은 글짓기 대회.


그리고 나서부터 글쓰기가 싫어졌다. 그 후에는 글쓰기 대회에 내는 숙제에 진심을 담지 않았다. 대충대충 원고지 분량을 채워서 내고 빨리 잊어버렸다. 칭찬과 상을 받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지만 그런 마음은 구석으로 좀 밀어내기로 했다.

대회에서 상을 받는 일에는 관심을 끄고 지내던 고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석고 조각을 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여자아이가 기대어 서 있고 아이의 가슴팍 부근에 동그란 구멍을 파낸 조각이었다. 미술 수행평가 과제로 냈는데,

미술 선생님 마음에 들었던지 학교 축제에 전시를 하자고 했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만들어서 칭찬받은 적은 없었기에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조각을 살펴보며 이것저것 수정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뾰족한 모서리를 좀 더 다듬고, 여기는 더 깊게 파내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 뾰족한 사각 모서리를 좋아했고 더 고치고 싶지 않았다. 미술 선생님은 다정한 분이었고 내가 설명을 하면 들어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5학년 때의 글짓기 때가 떠올라 딱 그만두고만 싶었다.


점심시간에 나는 교실 창틀에 올려놓은 내 석고 조각을 툭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얀 석고가 조각조각 바닥에 부서졌고 반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실수인 척하기도 싫었다.
"고치기 귀찮아서 그랬어. 누가 전시하고 싶대?" 친구들에게는 쿨하게 말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바로 교무실로 찾아가서 조각을 고치다가 떨어뜨려서 깨져버렸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시 만들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굳이 다시 만들고 싶지 않다고, 전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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