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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29. 2024

술 잘 마셔 뭐 하니

바깥에 나가면 늘 술이었지




 술을 잘 마신다는 헛된 자부심에 차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서른이 넘도록요. ‘술자리에 끝까지 잘 앉아있는 사람’이 정체성 중 하나였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어요. 집에 들어가기보다 밖에 머물기 좋아했고, 술자리에서 사람들 지켜보기를 즐겼습니다. 곁에 앉은, 나보다 술이 약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취해가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술이 들어갈수록 경계를 풀고 느슨해지는 마음이 눈빛에 드러나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람을 향한 애정이 넘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술에 취해 진심을 보여주는 순간을 마주치면 행복감을 느꼈어요. 알코올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라고 믿었습니다. 술에 취해 망가지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술자리 한 번으로 친구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젊은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흔이 넘은 지금의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사람에게 곁을 내어주기 전에 함부로 긴장을 풀지 않고 정보를 모으는 어른이니까요. 회사 생활을 하지 않고,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종종 만나던 남편의 지인들과도 술자리를 거의 하지 않으니 나와 영 맞지 않는 사람과는 술잔 부딪힐 일조차 없습니다. 아주 가끔 남편이 집에 초대한 손님과 술을 마시긴 하지만, 그것도 분위기에 맞추는 예의일 뿐이에요. 혹은 내가 그저 맥주 한잔하고 싶어서 마시는 거죠. 그런 날에는 활짝 웃으며 짠! 을 외치지만, 실은 누가 같이 있든 별 상관없어요. 내가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술친구보다 술이 먼저거든요.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나의 술은 '혼술'입니다. 저녁 먹을 때 반주로 막걸리를 한두 잔 하는 거죠. 아니면 늦은 밤에 영화를 보면서 생라면과 맥주 혹은 와인을 마십니다. 편해요. 혼자서 마시는 술이 좋습니다. 아주 좋지 못한 습관인 걸 알기에 혼자 절주 했다가 금주했다가 또 마시는 패턴입니다. 쓰다 보니 술 생각이 나네요. 밖에 바람이 많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는데, 냉동실에 있는 쥐포를 구워서 맥주 한잔할지 고민하다가 말았어요. 알코올만큼 힘이 센 친구가 있다면 게으름이지요. 아무튼 <드링킹>을 다시 읽으면서, 술에 자주 취하던 지난날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보통은 그냥 흘려보내는 기억들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도저히 흘러가지 않더군요. 그런 김에 또 이런 걸 쓰고 있어요.


 학원에서 퇴근할 때는 밤 10시쯤이라 무얼 먹으러 가든 술집에 가게 됩니다. 몇 시간씩 강의하고 학생들과 원장에게 시달렸으니 서둘러 허기를 채우고 스트레스를 풀어야 합니다. 최저시급도 안 되는 급여를 받는 형편이었는데, 그 시절에 마침 다양한 안주를 저렴하게 파는 술집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어떤 친구들보다 훨씬 돈독했던 강사 동료들과 자주 갔던 가게들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사라진 프랜차이즈 ‘피쉬 앤 그릴’에서 튀김 샘플러와 과일소주, 평화시장 똥집골목에서 먹던 찜닭과 똥집 프라이드(나는 똥집을 안 먹어서 고구마튀김을 잔뜩 집어 먹었지만), 동구 시장 초입 까만 간판에 4,900원이 쓰여있던 동네 술집과 우후죽순 생겨났다 사라진 얼음 막걸릿집과 산오징어 가게. 동성로를 돌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했지만, 역시 그 시절은 애절한 발라드 음악에 섞여 웅성웅성하는 소음 가득한 밤의 술집이 먼저 떠오르네요.


 술을 자주, 많이 마셨어요. 술을 마시고 목소리를 점점 키워가며 하하 호호 많이 웃었지요. 직장에서 벌어지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한 잔 마시며 털어내려 하고, 기분이 좋을 때면 술을 잔뜩 마시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에도 내 앞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고, 데이트에도 맥주나 소주, 혹은 소맥이 있었죠. 연애가 삐그덕 댈 때 나는 술에 취해서 울었고, 대충 봉합한 사이는 흥겨운 술자리로 채워서 즐거운 듯이 지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 혼자인 나는 슬프고 가라앉아 외로웠는데, 그런 자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또 술자리를 만들어요. ‘오늘 한잔 콜?’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어지고 잘 웃을 수 있었어요. 술을 한두 잔 마시고 나면, 주사 맞는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온몸이 뻣뻣한 채로 종일 지내왔다는 자각이 듭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아.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야. 가볍게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날도 있고, 과음하는 날도 있습니다. 과음하고 벌인 남부끄러운 짓들이 참 여러 가지이지요. 술자리에서는 필름 한 번 끊긴 적 없지만, 택시비가 모자라서 천 원을 덜 내고 도망친 적도 있고, 길에 토한 적은 정말 너무 많아요.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는 혀가 꼬이고 화장실에 달려가던 기억도 나고, 방 안에 토한 채로 누워서 잠들려고 했던 것도…. 차라리 필름이 끊겼으면 나았을 기억이 아주 한 보따리, 두 보따리 끌려 나옵니다. 어휴, 왜 그러고 살았을까요. 젊고 철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겠죠. 술이 주는 위안의 대체제를 찾지 못해서 그랬겠죠. 맨 정신으로만 지내기에는 고달프고 힘들고, 무엇보다도 긴장을 절대 풀 수가 없었으니까요. 어리석은 술의 시대와 더불어 매몰 비용 같은 연애가 이어졌습니다. 시작부터 알코올이 넘실대던 관계는 끝까지 너저분한 만취 상태로 끊어졌어요. 청춘의 두꺼운 한 챕터, 이불이 찢어지도록 뻥뻥 차도 돌이킬 수 없는 나의 20대에는 온통 술에 취한 내 모습만 남은 것 같아요.


 힘들 때마다 든든한 의지가 되어준 술. 따스하고 알딸딸한, 시원하고 후련한 술들.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술이지만, 절주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를 찾는 아이가 있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을뿐더러, 술에 의지하는 자신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술에 취할 시간에 하고 싶은 취미 생활도 한가득한데…. 그래도 역시 술 이야기를 길게 했더니, 오늘 밤은 한 잔 마시고 싶어요. 이럴 수가, 맥주가 다 떨어졌군요. 이렇게 하루 참고 내일 저녁 먹을 때 막걸리 한 잔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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