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는 추운 겨울 날들
2월 3일 월요일
다음 달에 고등학생이 되는 학생과 마지막 수업, 명랑핫도그와 떡볶이를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무턱대고 놀려고 하지 않고 모의고사 한 회를 풀어와서 보람 있었다. 모녀, 남매와 자매, 가족 관계는 좀스러운 면에서 다들 비슷하다. 듣고 말할수록 좁은 마음에 갇히는 기분이지만,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점에 언제나 안심한다. 벗어나지 못하는 유년의 기억에서는 영원토록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 대처법이 필요하다. 여학생이 주고 간 손 편지에 몹시 감동했다.
2월 4일 화요일
동시 수업 첫 시간, 아름답고 어려운 동시. 읽을 때는 행복하고 배울 때는 벅차오르지만,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가슴이 옥죄어온다. 사랑에서 비롯하는 감각임을 알아도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쑥갓이 올라간 얼큰한 칼국수를 먹었다. 시시껄렁한 잡담과 진지한 대화 사이를 몇 초 만에 오락가락하는 시간을 반복하며 기운을 얻는다. 커피와 크로플을 먹으며 ‘멋짐’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없음’이 어떤 방식으로 하찮은지, 그야말로 중요하지 않은 화제를 일생일대의 문제처럼 진지하게 논의했다.
동시와 멋짐의 기운을 잃지 않고, 여름이 미술학원에 간 동안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다.
2월 5일 수요일
바닥 요가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머리 서기를 또 한 번 실패하고 동네 동생들과 밥을 먹었다. 처음 가본 샤부샤부 집과 빵집이 다 괜찮았다. 화젯거리가 된 사람이 곧장 전화를 걸고, 방금 이름을 말한 친구가 테이블에 다가와 인사를 했다. 집에 와서 내가 펼친 책에 마지막 대화 주제였던 핼러윈이 나와 ‘묘하게 용한 하루’라고 낄낄거렸다.
맛없는 귤이 많이 남아 저녁에는 귤잼을 만들었는데 오래 걸린 만큼 맛있어서 다행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어제 받은 생일 카드가 떠올라 펼쳤다가 감동해서 코가 시큰했다. 돌이켜볼수록 올해 생일은 참 좋다.
2월 6일 목요일
그림티 모임 날. 조금 먼 동네에 있는 예쁜 카페에서 언니들을 만났다. 여름의 입학을 축하한다고 언니들이 꽃무늬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감동하여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할 만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의 학교 준비물을 살 때, 봉투를 보며 또 감동하겠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바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학년 엄마는 바쁘다며, 언니들이 응원과 걱정을 해주었는데 그게 세상 든든하고 고마웠다. 언제든 우리 동네에서 만나자고 말해주는 언니들과 늘 먼 길 달려와 주는 동생이 함께하는 그림티 모임, 사랑한다.
밤에는 ‘도자기 찻잔 북클럽’ 줌모임이 있었다. 3초 동안의 맹세 ‘우리는 올해 물을 많이 마시는 북클럽 회원들이 되는 겁니다.’를 기억하려고 공책에 써두었다. 김소영 작가님에게 텃밭 농사를 가르쳐 주는 그날까지 건강하고 씩씩하게!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 – 도자기 찻잔 북클럽에 낸 글
본가와 시가가 시골에 있어 자주 국도를 달린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들 가운데 번듯한 집이나 근사한 마당이 점점 더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내가 시골 할머니가 될 거라는 예감은 아마도 현실이 될 것이다. 백 세가 넘어서도 아침마다 팔 벌려 뛰기를 한다던 아랫마을 할머니처럼 건강한 노인이 되고 싶다. 자식 손주가 찾아올 때마다 용돈을 척척 내주어 주말마다 집이 북적인다는 부자 할아버지도 부럽지만, 나는 자식이 하나이고 손주는 생길지 말지 알 수 없으니 그 욕심은 접어둔다. 영감이 곁에 있든 없든 그저 나는 나대로 씩씩하고 느긋한 할머니가 되면 그만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에 나오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올리브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올리브가 가진 집과 정원을 가꾸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경적에 놀라지 않을 만큼 찻길에서 웬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집에 사는 할머니. 대문 옆에는 나이 많은 목련 나무와 명자나무가 자란다. 큰 창 바로 앞에 꽃밭이 보이도록 할머니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모종과 구근을 심는다. 텃밭에는 파와 풋고추, 상추와 배추가 자라겠지. 그때는 더 이상 지렁이나 애벌레를 보고 움찔하며 겁먹지 않아야 할 텐데.
마흔이 되기 전부터 들불처럼 번지는 새치의 기세를 보면 풍성하고 짧은 백발을 유지할 수 있을 테고, 지금처럼 꾸준히 움직인다면 근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신 없는 치아 건강이 염려스럽긴 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노화가 아니겠는가. 돋보기를 챙겨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몇 번 바뀐 건지 알 수 없는 마블 히어로 무비를 반가운 마음으로 챙겨보고 싶다. 동네 친구들과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고, 때맞춰 끼니를 챙겨 먹고, 정원과 텃밭을 돌보고,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는 할머니. 간혹 친구가 찾아오고, 혼자서도 하루가 짧도록 바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낯선 이들(택시 기사님과 잠깐 알던 사람의 어머니) 의 덕담대로 살림살이 넉넉한 장수 할머니가 되길 바란다.
2월 7일 금요일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초등학교 행정실에 갔다가 동네 마실도 다녀왔다. 커피와 빵과 샐러드가 모두 맛있었다. 데일리 친구에게 김치를 나누어주고 오후에는 여름의 태권도 학원 체험이 있었다. 부끄럽다며 몸을 배배 꼬다가 눈물을 흘리고, 엄마들 사이에 앉아서 수업 구경을 끝까지 하는 아이를 보면 답답하다가도 우습다. 어릴 때 찍은 사진들 속 늘 삐치거나 심통이 나 있는 내 모습과 똑같아서.
아이 옆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겨우 깨어나 씻고 내 북클럽 줌모임을 열었다. [무서록]은 북클럽에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안 읽히는 책이어서, 처음으로 책 선정 실패인가 하는 후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역시 이태준의 산문이 좋았고, 회원들도 반 이상 완독해서 기뻤다. 주절대며 말이 길어졌지만, 북클럽 마무리 모임은 언제나 그렇듯 좋았다.
2월 8일 토요일 – 2월 9일 일요일
만족스러운 주말이었다. 토요일에는 아이가 책방에서 길게 머무는 동안,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고 초밥을 먹었다. 슬쩍 외로울 뻔한 타이밍에는 친구들과 우연히 마주쳐서 더할 나위 없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혼밥으로 식당에 앉아 초밥을 먹은 건 처음이어서 어쩐지 어른이 된 기분. 큰마음 먹고 여름이 가장 좋아하는 물놀이장에 갔다. 아이들끼리도 어른들끼리도 잘 먹고 잘 놀아 편한 날.
일요일에는 여름의 감기 증세가 심상찮아 아동병원에 갔다. 중이염이라 약을 받아 카페에서 조금 놀았다. 안담의 책[친구의 표정]을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너무 멋져서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모를 지경. 집에 와서는 뿌리가 난 제라늄을 화분에 옮겨 심고, 빈 화분에 새 흙을 담아 프리지어 구근을 심었다. 싹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