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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Mar 02. 2021

욕망 때문에 불행한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여간 어색하고 민망한 것이 아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꺼리는 성향은 아니다. 엄마들끼리 모였을 때야 ‘누구 엄마예요’ 하면 그만일 일인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면 어쩐지 주저하게 된다. 공개된 곳에 익명의 독자를 향한 글을 게시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이 더 강해졌다.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하기에는 간격이 길 때는 한 달을 넘겨 겨우 한 개를 쓸 때도 있었고, 공식적인 지면에 소개되는 혹은 고료를 받는 글도 아니다 보니 애매했다. 그렇다고 “애들 키우고 있어요.”라고 말해버리면 나의 애씀에 대한 무용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만 같아 괜스레 혼자 마음이 상했다. 솔직히 엄마가 된 후로 자기소개는 쭉 싫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해도 할 때마다 <애만 키우는> 내가 한심하고 답답했고, 그렇다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막막했다.




아주 깊은 우울로 들어가기 직전에 어떻게든 우울함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일들을 해 보았다. 밀린 바느질을 하고, 마당의 낙엽을 쓸고 담장을 타고 길까지 넘어온 담쟁이를 잘라냈다. 대바늘을 사서 아들의 실(큰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코바늘 세트와 털실이었다)로 내가 먼저 뜨개질을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의 뜨개질이었다. 간단하게 막내의 넥워머부터 시작했다. 막내 사이즈에 맞추다 보니 작아서 금방 떴는데, 너무 오랜만이었는지 코 간격이 들쭉날쭉하고 아예 빠져버린 코까지 있어 엉망이었다. 그래도 막내는 아주 만족해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이보리 색을 잘 골랐는지 멀리서 보면 꽤 이쁜 넥워머가 완성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눈이 왔다. 아주 이른 아침부터 집 앞 도로의 눈을 치웠다. 빨리하지 않으면 이웃의 누군가가 먼저 해버리기 때문에 꽤 서둘러 눈삽을 들고나갔다. 눈을 치우고 들어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하얀 눈을 보며 친구가 후원해 준 털실로 다시 넥워머를 뜨기 시작했다. 치렁치렁한 목도리는 불편한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목을 감쌀 무엇이 꼭 필요했다. 아직 쇼핑을 할 수 있었던 겨울, 그러니까 적어도 2년 전쯤, 옷 가게에서 몇 번 들었다 놨다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직접 떠야지 싶었다. 역시 뜨개질은 치료 효과가 있었다. 넘치는 생각을 조절해 주는 호르몬제 같았다. 손에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생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가지 다 나에게 필요한 처방이었다.


<이러저러한 노력>


그리고 귀를 뚫었다, 다시.   


대학 입학하자마자 했던 것 중 하나가 ‘귀 뚫기’ 였으므로 당연히 내 귓불에 귀걸이가 들어갈 구멍이 있어야 했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귀걸이를 할 상황이 점점 줄었다. 그보다 귀걸이를 찾아 꽂을 정신이 없었고, 첫 아이가 워낙 왕성한 호기심과 에너지를 가졌던 터라 어쩌다 엄마 몸에 뭔가 걸려 있다 싶으면 귀걸이든 목걸이든 잡아당기고 쥐어뜯었다. ‘저것을 맛보고 말 거야!’의 기세로 무엇이든 입에 가져가던 아주 작을 때부터 좀 커서 자기 조절이 가능할 때까지 쭉 그랬다. 그러니 귀걸이는 점점 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도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나 아이들이 조금 큰 후에 가끔 멋을 부리고 싶을 때 하기도 했는데, 한쪽 귀가 귀걸이를 할 때마다 붓고 아프더니 어느 날 결국 막혀버렸다.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가끔 아쉬웠다. ‘아, 오늘은 귀걸이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날에.


독일 생활은 뭐든 스스로 하도록 했다. 아이들의 이발이야 한국에서부터 남편이 도맡아 했었지만, (그 당시 막내는 깎을 머리가 없었다) 내 머리와 본인 머리까지 깎게 될지는 몰랐다. 나는 진심으로 요리에 임하는 편은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것저것 시도해 보긴 했지만 ‘가족이 먹는 모든 것을 만들어 먹인다’는 주의는 아니었다. 김치나 밑반찬 같은 경우는 양가에서 꽤 많이 수급받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먹고 싶으면 ‘만들어야' 한다. 사 먹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요리는 라면, 짜파게티, 비빔면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남편까지 팔 걷고 나섰다. 물론 본인이 강렬하게 먹고 싶은 게 생겼을 때의 말이다. 여기서 제빵도 본격(까지는 아닌가?)적으로 시작했고, 김치 정도는 맘만 먹으면 담그는 등 요리의 스펙트럼이 한국과 비교가 안 되게 넓어졌다.

그러니, 귀 정도는 스스로 뚫어보자! 생각에서 실천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귀 뚫는 기계(Ohrlochstechmaschine)'로 아마존. de에서 검색하니 과연 결과가 자르르 쏟아졌다.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 그중 적당한 가격과 성능으로 추측되는 하나를 골라 구매했다. 귀 뚫는 기계가 오자마자 위치를 정하고 귀를 뚫었다. 막혀버린 원래 자리 구멍 하나와 바로 그 위에 하나 더 이렇게 두 개를 뚫었다. 스스로 귀 뚫는 것을 본 남편은 독하다며 몸서리를 친다. 하나도 안 아픈데. 그리고 몇 해 전 부모님이 어떤 사정으로 돌려받은 항공권 비용 일부로 사주신 귀걸이 세트를 꺼내 소독하고 귀에 난 구멍 세 개에 꽂아 넣었다. 내가 이렇게 실행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귀를 뚫고 사진을 찍어 친구들한테 자랑까지 하고 나니 아주 중요한 일을 해 낸 양 으쓱해졌다.

<Photo by Egidijus Bielskis on Unsplash>

아주 예쁜 귀걸이들이 많았다. 금으로 그려놓은 듯한 하트가 심플하면서 깜찍한 귀걸이, 색색이 반짝이는 큐빅이 꽃 모양으로 박혀 화려할 것 같지만 의외로 단정한 귀걸이, 귀를 사이에 두고 앞쪽에는 짧게 뒤쪽에는 좀 더 길게 늘어진 원기둥 두 개가 짤랑거리는 롱 드롭 투 웨이 귀걸이, 화이트, 연핑크, 핑크, 노랑, 바이올렛, 스카이 블루, 연그린, 그린 고운 빛의 자개를 심플한 모양으로 세공하여 귀에 딱 붙는 형태로 단아한 귀걸이, 어느 때고 즐기는 진주 귀걸이. 그동안 사고 싶었고 갖고 싶었던 귀걸이가 모두 액세서리 통에 들어있다.


"와아~! 이게 무슨 일이야?"


차례로 끼어 보고, 다시 끼고 보았다. 기분이 한껏 좋아서 이 멋진 서프라이즈 선물을 남편이 해 주었나 싶어 남편을 찾다가...

잠이 깼다.


욕망의 모양이 다채롭고 화려했다.
아주 작아 보이지만 달아보면 달라 보일 것 같은 것이 갖고 싶었다.




코 시국에 아이들에게 게임의 세계를 열어줬다. 아이들이 어리기도 했고, 큰아이의 성향을 너무 잘 알아서 쉽게 열어주기 힘든 문이었다. 민트는 한 번 빠지면 다른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만 보는 현미경의 집중력을 가진 아이라 게임 중독이 남의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게임을 시작한 아이들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게임 이야기만 했다. 그날 식탁에 앉아서도 계속 게임이 대화 주제였다. 이야기는 게임을 같이 해주는 아빠들로 흘렀다. 아이들은 그런 아빠들이 아주 부러워 “아빠는 게임 안 해?” 기대에 찬 질문을 했지만,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인 아빠에게 왜인지 게임이 별세상 이야기였다. ‘게임에 이렇게 취미가 없는 사람도 있구나, 그게 바로 아빠구나.’로 끝난 아이들에겐 조금 서글픈 엔딩. 아빠에 대한 실망으로 관심은 엄마한테 튀었다. “엄마는 힘들면 게임하잖아.” 민트의 촌철살인에 뜨끔했다. 그 힘들 때가 바로 지난겨울이었다. 우울과 욕망이 고리로 연결되면 악순환이 돌고 돈다. 실행력은 제로여서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절망만 쌓인다. 이때다 싶은 우울은 삶을 집어삼킬 듯 덮쳐온다. 꼬리에 꼬리를 문 불행에 갇혀 보내는 동안 멍하니 앉아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지나가 주기를. 이 시간이 제발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그러다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자각이 오면 지우고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다른 게임을 깔고 그렇게 지우고 깐 게임이 몇 개인지 모르겠다. 뜨개질같이 생산적인 일로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던 때는 그나마 우울을 컨트롤할 수 있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욕망의 불균형은 아마도 쓰는 일로 자아의 성취를 이루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나의 일상을 여지없이 가사노동과 아이들 양육에 투신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매 순간 좌절을 경험하게 했고, 끝없는 바닥을 보게 했지만, 아이들로 인한 충만한 기쁨의 순간들로 그럭저럭 버틸 수가 있었고, 육아 쪽보다는 가사노동 쪽에 오히려 효능감을 맛보았다.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됐고,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개켜 놓았던 자국만 남은 반듯하게 구김이 없는 옷, 영향의 균형이 잡힌 식사, 제 자리를 찾아가 있는 물건들, 먼지와 얼룩 없는 바닥과 가구들, 제때 비워지는 쓰레기, 언제든 깨끗한 채로 차곡히 쌓여 있는 그릇과 식기들. 그런 것들이 안정감을 주었고, 작게나마 가사노동의 내적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 안정감에 균열이 오기 시작한 것은 독일에 이주 후였고, 가사노동과 육아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역시나 착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커져 버린 주거공간은 가사노동을 몇 배 분량으로 늘려 놓았고, 일이 끝나지 않은 채 다음 일들이 몰려왔고, 끝나지 않은 일의 찝찝함만 남고 완료의 만족은 요원했다. 아이들이 좀 크고 나자 폭삭 주저앉기 시작한 건강도 한몫하였다. 기본적으로 육체노동인 가사를 만족스러울 정도로 다 하고 나면, 몸이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몸을 배려하지 않은 노동의 대가로 몸이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널부러져 있는 욕망의 흔적들

이만하면 다시 나의 삶을 찾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은 공교롭게도 COVID-19가 시작됐던 시점이었고, 다섯 사람의 24시간 동거 기간이었다. 세끼 새끼는 돌아서면 돌아왔고 치우고 나면 또 배가 고프다는 아이들의 오전, 오후 간식까지 챙기고 나면 온종일 먹는 것과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살려고 먹는 것일 텐데 가족들을 살리려고 차려내야 하는 밥상에 정작 나는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다시 학교와 유치원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남편은 쭉 집에 남았다. 그 덕에 점심이라는 빌런이 등판했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의 가운데 턱 하니 놓여서 시간을 또 분절시켰다. 혼자 있을 때는 점심을 먹든 안 먹든, 간단하게 떼우든, 어쩔 땐 신경 써서 먹든, 시간의 분배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는데, 영 애매하게 잘린 시간에 집안일도 글 쓰는 일도 완료되지 않은 채로 점심이 끼어들었다. 작업장(집안일이든 글쓰기이든)에 아무도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동이 경제적 이득으로 환산되어 쥐어지지 않는 한 그것을 보장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만족의 연속인 가사노동의 점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비치는 순간은 있다. 바로 저녁 식사 후 그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식탁과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난 뒤다. 그때는 비록 실제 가사노동이 끝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 팔을 만세하고 “퇴~근~!”을 외친 것처럼 개운하다. 아주 짧은 시간의 만족감을 느끼고 다시 자지 않으려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거나 빨래와 씨름하거나 다 내팽개치고 노트북 앞에 앉기도 침대에 누워버리기도 한다. 그 시간은 남은 일과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스스로 틔워 준 숨통이다. 아이들이야 워낙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지만. 유난히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에 치여 지친 날, 저녁을 다 먹어갈 즈음 우리 집 먹보를 담당하고 있는 둘째가 후식이 먹고 싶다고 해서 진심으로 화를 낼 뻔했다. ‘쪼꼬야, 오늘은 정말 엄마가 후식까지 챙겨줄 기운이 없다!’ 맹렬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뻗어 있었더니, 기름진 것들이 잔뜩 먹고 싶었다. 한국에서 먹어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먹고 와서 그 맛이 궁금하기만 한 명랑 핫도그, 아직 따끈하게 튀겨낸 떡에 빨간 소스를 듬뿍 묻힌 떡꼬치 같은 것들. 그 모양을 떠올리고 맛을 상상하자 식욕은 뇌에서부터 터져 나와 미뢰를 거쳐 온몸을 장악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꿈같은 거 꾸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까?


욕망을 저버린다 해서 행복해질 자신은 없어 그 생각은 핫도그와 떡꼬치 사이에 넣어 두었다.


대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보게 된 <괴물>의 헤드폰녀, 인터뷰를 떠올렸다. 그때만큼 임팩트를 주는 역할은 아니었지만(물론 헤드폰녀도 임팩트를 주려고 맡은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단역 배우의 애환 같은 것을 묻자 그는 “현장에 있는 게 너무 좋다. 연기하는 동안 다 잊혀진다.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라고 대답했다. 역할의 크기에 연연하지 않고 성실하게 성취해 가는 덤덤한 끈기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꿈의 실현을 위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쓰지 않은 소설로 등단이라는 허황한 꿈만 꿀 일이 아니었다. 일단 일을 벌이는 동료들이 필요했다. 벌려놓은 판에 끼어들어 어쩔 수 없이라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지난해 그렇게 사람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옆에서 함께 걸어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맙게도 각자의 소망은 서로를 격려하는 힘이 되었다.

인싸 친구 덕분에 꽤 빨리 클럽하우스에 입성했다. 구형 모델이어도 아이폰을 선택했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독립출판과 독립서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길을 보여주었다. 자비로 책을 내고 유통까지 스스로 하는 독립출판, 그렇게 나온 흔치 않은 책들을 특색 있는 컬렉션을 갖춘 독립서점에서 팔고 있었다. 물론 독립 출판물을 독립 서점에서만 유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연결은 튼튼해 보였고, 진한 유대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성실하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만으로도 자극을 받았다. 어떻게든 길을 찾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며칠 후 튀김기를 꺼내 기어이 떡꼬치와 핫도그를 해 먹었다. 상상하던 그 맛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충족은 있었다. 명랑 핫도그와 분식집 떡꼬치 대신 어설픈 엄마표 핫도그와 떡꼬치에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니 미소가 떠오른다. 그리 불행하지 않은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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