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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Aug 22. 2023

이력서를 쓰세요

팀원과의 원온원 미팅에서


"오늘 1:1미팅은 이직 권장 미팅인가요, 팀장님?"

팀원이 묻는다. 

에이, 설마. 팀원들이랑 같이 잘 해보자고 하는 1:1(원온원)미팅에서 팀장이 설마 이직을 하라고 하겠냐고요. 


이직이 아니라, 이력서를 쓰라고 했다. 한 명한테가 아니라 팀원 모두와의 1:1미팅에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뭘 하고 싶고, 뭘 잘하는지, 이때까지 어떤 일을 했고, 거기서 뭘 배웠는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가장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력서'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얘기를 잠시 해본다. 

꼭 이직을 하지 않아도 이력서를 수시로 업데이트 해두어야 한다는 얘기는 5년쯤 전이었던가, 어떤 임원분에게 들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신선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었다. 왠지 이력서를 쓴다는 거 자체가 멀쩡히 다니고 있는 회사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보는 게 어째서 배신인가. 무엇보다 이력서를 쓰기만 하면 바로 줄서서 모셔가는 줄이라도 알았던 천진함이 참.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떤 분이 커리어 코칭을 해주겠다고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하시는 바람에 부랴부랴 이력서 양식을 다운받았다. 10년 넘게 한 회사에 다니면서 한번도 써본적 없는 이력서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해 온 세월이니 쉽게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름 석자 적고, 전화번호 적고, 입사 년도까지는 쉽게 적었는데,... 

이제 뭐라고 쓰지? 나 왜 이렇게 한 게 없지?! 

간단히 자기 소개 하고, 뭘 잘하는지, 지금까지 뭘 했었는지 적으면 된다는데, 쓸 말이 없는 거다. 빨리 뭔가를 적으라고 나를 노려보는 그 텅 빈 빈칸들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실무자 시절 가장 많이 했던 '보고서 작성'을 스킬이라고 적을 수도 없고, 프로젝트의 이름을 적었다가 나 혼자 한 것도 아닌데 써도 되나 싶어 지우고, 스탭 부서로서 열심히 현업을 지원하고 실무를 쳐냈지만 그게 뭐 대단한 성과인가 싶어 쓸 말이 없는 거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빈 페이지를 꿈벅꿈벅 쳐다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간신히 한 글자, 한 글자 적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거쳐왔던 팀의 이름을 쓰고, 당시 내 역할이었던, 'ooo 기획/지원/참여/실행'같은 업무를 쓰고, 별 거 아니었지만 작게나마 만들어냈던 성과들을 쓰고, 함께 한 일이지만 열심히 기여했던 일들을 더듬더듬 써내려갔다. 


썼다 지웠다를 밤새 반복하는데 신기하게도, 뭐라도 끄적거리고 나니, 별 거 아닌 것 같은 일들을 그럴 듯 하게 표현하느라 애쓰다 보니, 점점 에너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내가 이런 것도 했었지, 이 때 이런 고민을 했었지, 이 일로 칭찬도 받았었지, 이 일 덕분에 다른 팀에 갈 수 있었지, 등등. 


© thoughtcatalog, 출처 Unsplash


이력서라는 것이 원래 '내가 잘 해온 것, 잘 하는 일, 내 장점, 강점'만을 대놓고 나열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문서가 아닌가! 여기에는 약점을 적고 싶어도 적을 곳이 없다. 심지어 실수했거나 잘못한 일에서도 나의 강점이나 배운점을 끄집어 내야 한다. 그저 난 정말 짱이라고 써야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에 근거해야겠지만.


처음에는 너무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살짝 우울했다가, 그래도 꾸역꾸역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 잠깐이라도 몸담았던 일에 내가 어떻게 기여했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괜히 뿌듯해지면서 살짝 자신감이 생기는데, 이 지점이 어쩌면 이력서의 가장 큰 효용인 것 같다. 그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네, 10년 회사 다닌 보람이 있네. 무언가 내가 여기서 중요한 일을, 혹은 의미있는 일을 했었구나, 내가 이만큼 성장했구나, 깨닫는 것. 


그뿐인가. '이력'을 쭉 훑다보면, 내가 잘 하는 부분들, 공통적으로 잘 한다고 인정받았던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분명히 서로 다른 조직에서 다른 일을 했는데도 공통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인정받았다던지, 데이터를 잘 뽑는다고 주구장창 그것만 시켰다던지, 어디서든 '실행력'이 좋다고 칭찬받았다던지, 등등. 평소에 그저 흘려보냈던 내 장점들을 이력서를 적으면서 캐치하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핵심역량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것도 이력서를 써야하는 이유다.


아, 만약 이력서를 다 적었는데도 공통된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지 못하겠다면, 혹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지금의 내 이력서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어필하기 어렵다면, 지금이라도 그 부분을 키울 수 있는 일을 찾아보거나, 자신의 과업을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 팀원이 자신이 이런 걸 잘 하고, 이런 걸 해보고 싶은데 팀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팀장으로서 흔쾌히 기회를 줄 것 같다. 물론 스스로 충분히 성찰하고 고민한 뒤에 조심스레 꺼낸 제안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팀장으로서 팀원 육성의 목적이, 어떻게든 이 회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죽도록 시키는 일만 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지금 이 회사, 이 팀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팀장의 역할은, 이력서를 써보라고 하는 것까지다. 이력서를 대신 써줄수도 없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만 쏙쏙 뽑아 시킬 수도 없으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조차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팀원들에게 커리어 로드맵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건 전부 팀원 각자의 몫이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기에 내가 무엇을 가르쳐서, 일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현재 위치와 역량을 파악하게 하는 것, 더 나아지고 싶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같이 방법을 찾아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었는데, 

알랑가 모르겠어요.

(혹은 전부 다 이직에 성공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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