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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Jan 30. 2022

아이의 생일

바빴지만 해피엔딩

새로 부임한 CEO가 전사 임직원에게 메일로 메시지를 전하신다 했다. 아직 공식 출근 전이라 직접 보내기는 어려우니 전문을 주며 대신 보내달라 하셨다. 보통 비서가 하는 일이지만 사내 소통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문화팀이 함께 임무를 맡았다. 새로운 CEO의 첫 공식 메시지니 실수하면 안 되었다. 오타는 물론 대상자와 발송 시각까지도 지시하신 그대로 해야만 했다. 신경이 곤두섰다. 출근하자마자부터 거의 3시간동안 매달려 오타를 점검하고, 대상자를 하나씩 지정하고, 몇 번의 테스트 메일을 거쳐 간신히 발송을 완료했다.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 갑자기 생각났다. 큰 애 생일 케이크! 직장 어린이집이라 별다른 답례품이나 선물은 준비하지 않지만, 생일파티를 위한 케이크는 사서 보내야 했다. 1년에 딱 한번 아이가 가장 기다리는 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축하를 받고 케이크를 나눠먹는 바로 그 빅 이벤트를 엄마가 완전히 까맣게 잊은 것이다. 맙소사! 

생일파티는 11시에 하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40분이었다. 부랴부랴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오후 간식 때 파티하자고 했어요. 걱정 마시고 2시 전에만 갖다주세요, 어머니."

출근길에 빵집에 들러 케이크를 직접 고르고 싶다는 아이에게, '엄마가 다 알아서 사다줄테니까 걱정마'라고 했었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도 꼭 (가성비 안 나오는) 캐릭터 장난감 케이크를 사달라고 신신당부길래, '알았다니까!'라며 다급히 들여보낸 아침이었다. 그러고는 단 몇 분만에 완벽하게 까먹다니, 엄마로서 나는 빵점이 아닌가. 엄마를 믿고 돌아서던 아이의 뒷모습과 케이크를 기다리다 실망했을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죄책감과 미안함에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정신없이 회사 주변 빵집에 전화해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간신히 한 군데 찾아 황급히 차를 몰고 케이크를 사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선생님은 엄마가 케이크를 안 주셔서가 아니라, 놀이 시간이 애매하니 오후에 파티를 하자고 아이에게 말했다고 했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탈탈 털린 멘탈을 끌고 자리로 와보니 내가 좋아하는 '뱅쇼'가 한 잔 놓여있었다. 힘내시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과 엄마 사이에서 멘붕인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팀원의 응원 한 잔이었다. 마시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지혜로운 선생님 덕분에 아이는 엄마에 대한 실망 대신 기대감으로 하루를 보냈고,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팀원들이 가까이에 있으며, CEO의 지시사항도 무사히 해냈으니까. 잠깐 롤러코스터를 타긴 했지만, 그 쯤이야 우리네 삶에 늘 있는 일 아닌가. 

워킹맘에게 죄책감은 언제나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특별히 뭔가를 잘못하지 않아도, 그저 우는 아이를 떼어 어린이집에 맡기는 순간에도 엄마들은 죄책감에 마음이 찢어진다. 마치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같고, 일 때문에 아이를 희생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한 순간에 '나쁜 엄마'가 되어 있다. 누가 나무라서가 아니다. 스스로 느끼는 무력감과 죄책감이 워킹맘에게는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숙제다. 슈퍼우먼 컴플렉스는 몇몇 완벽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끊임없이 아이와 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무력감에 시달리는 이 시대 워킹맘들은 다 이 병을 앓고 있는 듯 하다. 나 역시 환자다. 그것도 아주 중증환자.

어쩌겠는가. 엄마도 사람인데. 워킹맘이라고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두 개라 일도 하면서 동시에 케이크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침부터 너무 중요한 일에 바빴으니 케이크를 잊을 수 있고, 늦게라도 사다줬으니 된 것이다. 왜 이런 건 꼭 엄마가 해야 하느냐며 남편을 원망할 일도 아니며, 나는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며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그저, 매우 바쁜 하루였던 것 뿐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되었고, 실수가 최악의 결과로 치닫지 않도록 세상이 나를 도왔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에는 한 발 앞서 상황을 예측하고 주변 이들에게 미리 도움을 청하는 여유를 좀 더 발휘할 수 있기를. 

아이는 '소피아' 인형이 올라가 있는 예쁜 케이크를 보고 어깨뽕이 잔뜩 올라갔단다. 

해피엔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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