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알고, 나는 모르는 ...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알바가 없던 그 한낮에, 나는 간만에 돌아온 고향집 내 방에서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여느 날처럼 거실에선 동네 아줌마들의 믹스커피 티타임이 한창이었다.
여느 날처럼 모인 아줌마들의 주제는 역시 방학을 맞아 꾸물꾸물 집으로 돌아온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들 옷을 빨려다 보니 화장품이 잔뜩 묻어 있어서 몰래 가방을 뒤졌다는 얘기부터, 찢어진 청바지를 보란 듯이 꿰매 놓았다는 이야기까지. 자식들이 알면 기함할 얘기들이 이어지던 그때.
까무룩 잠들려는 나의 의식을 붙드는 엄마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 애가 고지식해서 걱정이야. 쟤가 외골수에 고집이 세잖아.”
세상에나!
잠에 취해가면서도 나는, 흘러나오는 비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면서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나는 사실 좋고 싫은 것이 그다지 없는 사람이다. 취향이 없다기보다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우유부단한 쪽에 가까웠다. 식당 메뉴조차 다수결을 따르고, 친구가 좋아하는 연예인마저 따라 좋아하는 그런 부류. 그런 내가 외골수라니.
‘그래, 자식 겉 낳지, 속 안 낳는다더니. 우리 엄마가 저렇게 나를 모른다’
그래, 그런 것이지. 부모라고 자식을 다 알겠는가.
게다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와 같이 살지도 않는데.
엄마는 모르는. 아니, 엄마는 상상도 못 할 새로운 세계에서 부대끼고, 깎이며 살고 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처음 들어보는 나에 대한 엄마의 평가는 그래서 딱 그 정도였다.
차라리 가방을 뒤지고, 통화를 엿듣지.
탯줄을 떼는 정도의 충격은 아니어도 무언가가 툭 끊기듯이. 조금은 쓸쓸하고, 아쉽고, 섭섭한 느낌.
엄마의 저 평가가 다시 떠오른 것은 생뚱맞게도 첫 연애의 끝자락에서였다.
첫 연애여서 그랬는지, 내 마음이 더 커서 그랬는지.
내가 먼저 고백한 연애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늘, 내가 더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많이 애타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나 혼자만 미래를 꿈꾸고.
그래서 더 좋아지기 전에, 더 상처 받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상병 휴가.
피 같은 그 며칠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그가 말했다.
“나 내일 오전까지 집안 행사가 있어. 미안해. 오후에 만나서 재밌게 놀자”
찰나, 번개처럼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리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준비했던 헤어짐을 실행할 때.
다음날 나는 그의 눈도 못 쳐다본 채로 헤어지자고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지 마”
나는 매몰차게 그의 손을 떼어냈다. 손끝에 떨림이 전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한발 한발 그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돌아가서 거짓말이라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도 돌아서 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잊혀진 것 같았던 오래전 엄마의 그 말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외골수에 고집쟁이.
그랬다. 그건 분노도 아니었고, 결심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엄마의 말처럼 그저 고집이었다.
나조차도 어째 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마음.
그 후에도 나는 삶의 고비마다 자주, 엄마의 그 평가와 맞닥뜨렸다.
아플 줄 알면서도 오래 곁을 준 사람들을 정리하고.
손해인 줄 알면서도 좋아하던 일에서 미련 없이 손을 털고.
화해하자며 내민 손들을 잡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프게 무릎을 쳤다.
대체 우리 엄마는 나도 모르는 나의 본질을 어떻게 꿰뚫어 본 걸까?
엄마의 평가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나에 대해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나은 선택들을 했을까?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는 거라고. 오랜 시간 후회하기보다는 잠깐의 물러섬이 낫다고.
마음이 냉정해지려는 순간이 올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를 다독였다면
내 인생도 조금쯤은 달라졌을까?
이제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내가 얼마나 고집쟁이이고, 얼마나 되도 않는 일에 용을 쓰는지. 이렇게 생겨먹은 나에 대해 깨닫게 될때마다 진저리가 쳐질만큼 지겹지만, 그래서 노력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아직도 한참은 멀었지만.
아무려나 우리 집 이여사는 초사이언인임에 틀림없다.
능력을 체험한 나는 비밀을 캐내는 스파이처럼, 어느 날.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옆에서 파를 다듬으며 슬쩍 말을 붙였다.
“엄마! 엄마는 내가 외골수에 고집이 센 걸 어떻게 알았어?”
“왜? 누가 욕해?”
“아니, 그냥 궁금해서”
“왜 몰라? 니 애비 자식인데. 씨도둑질은 못하는 거지”
헐......
진리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고,
엄마는 초사이언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