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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허블 Aug 19. 2019

투박해서 잊지못하는 시간의 맛,
    감자범벅  

NO 2. 엄마의 요리법(feat. 시집살이)

내가 태어났던 그해.

할머니는 자신의 생일날, 동네잔치를 열었다.


그러나 잔칫상을 차릴 유일한 일꾼인 며느리는 임신 9개월이었다.

물론 그 뱃속에는 내가 있었고.


아직은 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3월 초에 

만삭인 며느리가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뒷설거지를 하는 걸

안타까워할 만도 했으나,

애초부터 할머니에게 그런 일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결국 엄마는 남산만 한 배를 이끌고 할머니의 생일상을 차려냈고,

그대로 드러누워 앓다 나를 조산했다.


“그 배를 해서 양손에 장 본 걸 들고 걸어오는데, 소양강 다리가 얼~마나 길던지, 

내가 그때 생각을 하면 이 상을 차리고 싶지가 않어”


할머니의 생일상에 얹어 내 생일 미역국을 떠주며 매년 엄마는,

내 생일이 왜 할머니 생일과 이토록 딱 붙어있는지 돌림노래처럼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숨겨진 모습에 놀란다거나, 엄마의 시련에 새삼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 할머니는 최소한 엄마에게만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의 역사는 할머니와의 투쟁의 역사였으니까.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였는지, 

아니면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인 우리 집 사정이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고초 당초보다 매웠고, 한 성격 하는 엄마의 대거리도 참 찰졌다.


커가면서 엄마에게 매사 못되게 구는 할머니가 미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엄마 편을 들 수만은 없었다.

할머니는 늙어가고 있었고, 아빠는 비겁했으며, 왕좌는 이미 엄마의 차지였으니까.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을 공유하는 두 여자는 분명히 남남이었지만,

어쩌겠나, 나는 피가 섞인 할머니 손녀딸인걸. 


할머니의 기운과 말발이 딸리면서 당연히 부엌에서의 주도권도 완벽히 사라졌다.

그런 할머니가 유일하게 여름이면 잠시 부엌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순전히 감자범벅 때문이었다.


감자 범벅은 하지감자, 즉 햇감자로만 할 수 있는 음식이다.

햇감자가 아니면 포슬포슬 분이 나지 않아 아무리 범벅을 해도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는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감자를 적당히 삶은 후,

소금 간을 한 밀가루 반죽을 삶은 감자 위에 올린다. 

뚜껑을 덮은 후 밀가루가 뽀득뽀득하게 익으면 감자와 잘 섞어서 상에 내면 끝이다.


대체 이게 무슨 맛일까 싶지만,

쫀득한 밀가루의 식감과 포슬 한 감자, 

거기에 짭조름한 소금간이 그야말로 삼위일체다.

말하자면 재료 궁극의 맛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촌스러운 맛이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음식은 대게 이런 식이었다.

삶은 국수에 간장과 들기름을 휙 뿌려 비벼먹는 간장 국수. 

맹물에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넣어 훌훌 저어 먹는 장국.

밀가루에 고추장만 넣어 부치는 장떡.


당연히 엄마는 이런 할머니 음식에 질색팔색을 했다.

할머니가 저런 음식들을 우리에게 먹이며, 

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치맛자락으로 코를 흥 닦아줄 때마다 기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들이 좋았다.


“할머니, 감자범벅은 언제부터 먹었어?”

“옛날부터 먹었지. 여름마다 한 솥 해놓으면 아빠랑 고모들이 들락거리며 

 하루 종일 먹었단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뒤에서 궁시렁댔다.


“6.25 이후에 밀가루 배급이 느니까 그거 먹느라 해먹은 거지, 

옛날부터 먹기는 무슨. 그깟 감자에 밀가루 덩어리!”


엄마가 폄하한 건 음식이 아니라 아마 할머니였을 것이다.  


“니네 할머니 돌아가시면 봐라,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나”


그렇게 천년만년 살 것 같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감자범벅은 사라진 음식이 되었다. 


그러다 지난해, 

집에 내려가 빈둥대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캐왔다며 아빠가 감자를 한 박스나 들고 왔다. 

햇감자를 보자, 본능처럼 감자범벅이 생각났다.


“아빠, 감자범벅 먹고 싶다”

“그래? 그깟 거 내가 금방 하지”

“아빠가 할 줄 알아?”

“그럼. 먹어본 세월이 얼만데”


평소 자기 손으로 숟가락도 안 놓는 아빠가 

엉덩이에서 가락이 나올 듯이 신이 나게 불 앞을 오갔다.

그리고 30분도 안 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범벅이 완성됐다.


“옛날 그 맛이 맞네. 어떻게 아빠는 이걸 기억했어? 진짜 맛있다, 그치?” 

“맛있기는. 우리야 아니까 맛있는 거지”


역시 엄마는 뾰족했다. 


“엄마는 이렇게 못하지?”

“난 안 해. 니 아빠한테나 실컷 해달라 그래”


할머니는 마음의 우선순위가 확실한 사람이었고,

그 확실함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은 사람이었다.

손녀딸도 사랑했지만, 하나뿐인 손자가 더 소중해

손녀딸을 내놓고 차별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아들이 너무 귀한 나머지, 며느리는 평생 하녀처럼 대했다.


밭일, 들일을 많이 하느라 음식 솜씨가 없었고, 말솜씨도 없었다.

나는 그 촌스럽고, 이기적이고, 불합리하고, 투박한 할머니를 

미워했고, 불쌍해했고, 사랑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겠다던 엄마는 기어이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훔쳤다.


“왜, 안 운다더니? 막상 눈물 나?”

“억울해서 운다, 왜?!”


그 마음이 억울함이 전부였을까.

밀가루와 감자와 소금이 감자범벅의 전부가 아니듯이, 

엄마의 눈물도 억울함과 미움과 서러움이 전부는 아니였을 것이다.  


해마다 여름은 돌아오고, 

이 감자범벅의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요리법 –감자범벅 ▶


재료: 감자, 밀가루, 소금, 때에 따라 옥수수와 강낭콩 첨가


1. 껍질을 깐 감자를 냄비에 넣고, 감자가 2/3 정도 잠길 만큼 물을 붓는다.


2. 소금을 반 숟가락 넣는다. 

   (옥수수와 강낭콩이 있으면 함께 넣는다.)


3. 밀가루에 물, 소금 반 숟가락을 넣고 질게 반죽한다. 

   반죽은 수제비보다 되직한 정도로 한다.


4. 감자가 어느 정도 익으면(감자의 크기에 따라 10분에서 15분) 

  밀가루 반죽을 수제비보다 얇고 넓게 떠서 감자 위에 올린다. 

  이때 밀가루 반죽은 감자 사이사이 물기가 있는 곳을 위주로 덮듯이 올려준다.


5. 뚜껑을 덮은 후 불을 줄이고, 10분에서 15분 정도 뜸을 들이듯 익힌다.

   이때 반죽이 잘 익도록 주걱으로 반죽을 가로세로로 한 번씩 잘라주면 

   뜸이 더 잘 든다.  


6. 반죽이 다 익으면 감자와 함께 섞어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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