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엄마의 요리법 (feat. 경애의 마음)
내가 유년을 보낸 집은 80년대 초에 지어진 새마을 주택이었다.
무려 30년 융자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이 있었지만,
엄마 아빠의 첫 집이기도 했던 그 집은 그야말로 드림하우스였다.
문제는 그 드림하우스가 준공일에 맞춰 완성되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했다.
전셋집 이삿날은 다가왔는데, 새집엔 문이 없었다.
현관문, 방문은 물론 창문도 없었다. 그나마 도배는 돼있었던 것이 다행이랄까.
문도 다 안 달린 집에 전쟁을 치르듯 이사를 하고,
한 곳 한 곳 문이 달리고, 마당에 나무를 심고.
꿈꾸던 집이 꿈꾸던 모양을 갖춰가던 그때, 내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때는 늦여름이었던 것 같고, 아마 집안을 말리려 연탄을 땠었던 것 같다.
문뿐만 아니라 바닥도 덜 말랐다는 걸 아무도 몰랐고,
마침 집안엔 아이들뿐이었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마당 흙바닥에 누워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둥그렇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할머니 등이었다.
옆에선 엄마가 막 택시 문을 열고 있었다.
엄마의 손에 건네져 택시 뒷좌석에 눕혀지면서 나는 다시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산소탱크 안이었다.
코에 고무호스를 끼고 있었고,
이곳이 병원이구나 싶은 순간에 깨질 듯 한 두통이 몰려왔다.
미간에 잔뜩 인상을 쓰며 소리를 내자 간호사가 산소통에서 꺼내 주었다.
우르르 침대로 몰려드는 할머니와 아빠와 엄마.
그 걱정스런 얼굴들을 죽 둘러보고 나자 할머니가 덥석 손을 잡으며 물었다.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구야?”
누구긴. 할머니지. 내가 모를까 봐.
하지만, 대답할 기운은 없었다.
내가 그대로 눈을 돌리자 이번엔 아빠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빠 보여? 내가 누구야?”
세상에. 아빠까지 왜 이래.
내가 대답이 없자 울상이 된 엄마가 재차 물었다.
“말 좀 해봐. 내가 누구야?”
대체 왜 이 순간에, 다들 자기가 누군지를 나에게 확인받고 싶은 걸까?
순간 몰려든 것은 극도의 피로였다.
대답을 듣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것도 귀찮을 만큼의 피로.
정말 다 귀찮았다.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를 내버려 뒀으면.
그 순간엔 그 생각이 다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그때 내 반응을 본 가족들은 모두
내가 바보가 됐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분명 가스 중독으로 뇌에 이상이 온 거라고.
차마 내 앞에서는 못 울고 밖에 나가서 각자 울었다고.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정신이 또렷하고 사고가 명확했는지,
얼마나 제정신이었는지 두고두고 설명해야 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그 피로와 귀찮음은 제대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며칠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걱정처럼 침을 흘리고,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잠만 잤다.
동치미 국물만 먹고도 정신을 차리고 뛰어다니는 동생과는 천지차이였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아무 식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었다.
맛이 좋다, 덜 하다란 의미의 ‘없다’가 아니라 짜고, 달고, 고소하고, 느끼한.
그 다채롭고, 신비했던 맛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당연하게 먹는 일이 곤욕이 되었다.
점점 먹는 양이 줄어들었고, 급기야 링거를 맞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는 내가 좋아했던 음식은 물론 길 가다 길게 쳐다본 음식까지 찾아 대령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더 말하지도,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아이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춘천 명동이었는데, 내 손을 잡고 걷던 엄마가 갑자기 간판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엄마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김00 정신과였다.
무슨 결심을 했는지 엄마가 내손을 끌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안경에 얼굴이 네모난 의사 선생님이 나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물론 7살쯤의 기억이라 더 정확한 진료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심각한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다.
“평균보다 지능이 많이 떨어지네요.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 겁니다.
당장 글을 읽는 것도 힘들 수 있습니다.”
순간 엄마가 입을 막고 울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웃기시네, 왜 글씨를 못 읽어? 여기 명패에 있는 아저씨 이름도 읽을 수 있는데’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설명하는 일이 너무 귀찮았으니까.
솔직히 이런 한심한 얘기를 듣고 울고 있는 엄마도 너무 짜증이 났다.
그냥 나중에 나한테 읽어보라고 하면 다 해결될 일을 왜 이렇게 귀찮게 하나.
그날 돌아오는 내내 엄마는 별말이 없었지만,
나를 정말 모자란 애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글자를 읽어보라거나 하는 것도 시키지 않았다.
내가 다시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 뒷집 결혼식 피로연장에서였다.
먹지도 않는 애를 뭐 하러 데려가냐는 엄마의 핀잔에도 할머니는
꿋꿋하게 나를 데려가 기어이 잔칫상 앞에 앉혔다.
뭘 먹으려냐는 할머니의 물음에도 내내 고개만 젓고 있는데
갑자기 콩나물 볶음이 눈에 들어왔다.
빨갛고 윤기 나는 콩나물을 보자,
왠지 저거라면 하나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콩나물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매콤한 고소함이 느껴졌다.
어? 이건 뭔가 느낌이 왔다. 이어 나는 콩나물을 한두 줄 더 집어먹었다.
내가 콩나물을 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마자 밥상에 콩나물 볶음이 올라왔다.
식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콩나물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도 콩나물을 죽일 듯이 째려봤다.
신기하게도 다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젓가락을 들어 콩나물을 집었다.
‘아삭’ 아, 역시 알던 그 맛이다.
나는 그날 그 콩나물을 반 접시나 먹었다.
콩나물을 먹게 되면서, 차츰 밥도 먹고, 다른 음식들도 먹게 됐다.
그리고, 점점 귀찮은 생각과 몸을 찍어 누르던 그 무거운 피로도 사라졌다.
한참 후에 엄마와 춘천에 갔다가 그 정신과를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침을 튀기며 그때 못했던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대체 어린애를 앞에 놓고, 지능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는 의사가 제정신이야?
나 그때 다 알아듣고 있었다구.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아?”
우습게도 엄마는 의사 편을 들었다.
“그게 지능이 떨어지는 거지. 귀찮아서 말을 안 한다는 게 정상이니?”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가끔씩 살아내는 일이 너무나 피로해지고, 다 내던지고 싶을 만큼 귀찮아질 때.
그때의 그 콩나물 볶음을 생각한다.
그 빨간 국물에 밥을 슥슥 비벼 먹고 나면,
이 모든 일상의 지리멸렬함 들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 산다는 건 때론 그렇게 간단한 일이지.
내 인생을 구한 콩나물 볶음.
올해는 꼭 그 맛을 배우고 말겠다.
◀엄마의 요리법 –콩나물 볶음 ▶
재료: 콩나물, 들기름, 마늘, 파, 고춧가루, 깨, 소금
1. 냄비에 콩나물과 자작한 물을 넣고, 뚜껑을 덮고 익힌다.
2. 파, 마늘, 깨, 소금 한 숟가락, 미원 3분의 1 숟가락,
고춧가루 한 숟가락을 넣은 양념을 준비한다.
3. 5분 후, 콩나물이 한숨 익으면 불을 끄고, 뚜껑을 열어놓는다.
이때 오래 가열하면 콩나물이 질겨지므로, 살짝 익히기만 한다.
4. 들기름을 한 숟가락 콩나물에 넣은 뒤 아삭함이 유지되도록
약한 불로 슬쩍 볶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