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고, 하늘 높은 9월 중순에 일주일의 휴가를 쟁취했다.
근 세 달간의 주말을 반납하고, 진상들을 겪어낸 대가였다.
무조건 해외로 떠야 했다. 그래야 급한 일이 생겨도 전화를 못할 테고,
아이템이 펑크 나도 뛰어 나가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오랫동안 별렀지만 성공하지 못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엄마, 다음 주에 바빠?”
“아니. 왜?”
“혹시 여권 있나?”
“없어. 왜?”
“그치? 그래서 내가 시청에 전화해봤는데, 요즘엔 사흘이면 나온다네.
지금 바로 나가서 사진부터 찍어”
“왜?”
“왜 기는. 여행 가자고. 나 담 주에 쉬니까 여행가야 돼.”
“갑자기 여행은 무슨. 돈이 썩어 나니? 안가!”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가는 걸 보면 ‘좋겠다, 부럽다’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갈 생각을 못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시간이 없어서, 아빠가 걸려서, 돈이 아까워서, 심지어 개들 밥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 어느 것도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좋아는 보여도 막상 할 수 있을까 싶고,
그 돈과 시간을 써가며 그렇게까지 재미있을까 의심스럽고,
준비가 번거롭고, 그래서 결국 엄두도 나지 않고.
종합해보면 몰라서였다. 고기 맛을 못 봤으니 고기가 먹고 싶을 리 없지.
그래서 이번만은 엄마와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은 마음을 먹은 나는 거짓말을 장전했다.
“몰라. 나 벌써 비행기 티켓 끊었어. 호텔도 예약했고. 싸게 나온 거 잡아서 환불도 안 돼.
안 가면 허공에 돈 백 날리는 거니까 맘대로 해”
“그러게 왜 물어도 안 보고 해?”
“같이 갈 사람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
“아이구 참, 옷도 없는데... 말도 할 줄 모르는데, 무슨... 알았어. 있어봐”
먹혔다. 역시 돈 앞에 장사 없다.
결국 일주일 후 나는 엄마와 교토로 출발했다.
교토는 엄마와의 첫 여행지로 가장 만만한 도시였다.
도시가 작아 버스와 도보로 관광지들을 쉽게 둘러볼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가본 곳이라 헤매지 않고 곳곳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또 해외여행이 처음인 엄마에게 적당한 비행시간이기도 했다.
첫날,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명확하지 않았던 엄마의 표정은
청수사를 내려오면서 다양한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외국이라는 두려움이 점점 옅어지고, 이동의 긴장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이국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절 아래 상가들의 소란스러움과 다양한 먹거리를 보며 신기해하고,
관광객들 속에 어울려 사진을 찍고, 옛날 여중생처럼 손수건을 기념품으로 샀다.
다음날 나는 등짝을 맞으며 눈을 떴다.
“돈 들여 여기까지 와서 왜 늦잠을 자? 얼른 일어나. 빨리 아침 먹고 구경 가야지”
나에겐 꼭두새벽인 아침 7시에 엄마는 이미 화장까지 곱게 마친 채로 닦달을 해댔다.
그렇게 오전에 두 곳을 돌고, 점심 먹고 한 곳, 차 마시고 한 곳. 저녁 먹고 야경까지 보는
빡센 투어가 시작됐다.
교토를 세 번이나 와봤지만,
세 번 온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넓고, 더 많은 곳을 엄마와 누비고 다녔다.
내가 준비한 닷새짜리 코스는 거짓말처럼 사흘 만에 끝나버렸다.
풍경과 유적만 보는 건 지루할까 봐 중간중간 배도 타고, 관광열차도 타고,
공연을 봤는데도 그랬다.
“엄마, 이제 내가 아는 데는 다 갔는데 어디 가고 싶은데 더 없어?”
“어딜 가도 다 좋은 거 같애”
“그래도 뭐가 제일 좋았는데?”
“음... 밥 안 하는 거. 밥 안 하고 돌아다니니까 제일 좋네”
내참, 기가 막혀서.
그렇게 많은 곳을 보고, 체험하고, 얘기했는데. 결국 밥 안 하고 돌아다녀서 좋다니.
“그게 뭐야? 겨우 그깟 게 좋아?”
“그럼 좋지. 자유스럽고. 이제라도 수학여행 온것 같아서 좋네"
"수학여행?"
"내가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가봤어. 니 외할머니가 돈 없다고 안 보내줘서.
큰 이모는 큰딸이라고 보내주고, 큰 외삼촌은 동생이어도 아들이라고 보내주고,
막내 이모는 잘 살 때여서 다 가봤는데, 나만 못 갔어. 수학여행이 이런 걸까 싶은 게,
늦게라도 수학여행 온 것 같아서 좋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에 둘째 딸로 자라온 얘기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다 그랬다니까 배고파도 좋은 시절이었겠거니 했었는데.
혼자만 수학여행을 못 가고 서러워서 울었을 어린 소녀가
아직도 엄마의 마음속에 들어앉아있는 것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그럼 너무 늦게 왔네. 좀 일찍 올걸. 늦은 이자 쳐서 자주 가야겠다.
일 년에 한 번은 그렇고, 이년에 한 번은 나오자, 엄마”
“좋은 소리 한다. 허튼 생각 말고, 가면 일이나 열심히 해!”
우리는 이틀을 더 헤매다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엄마는 종종 나에게 뜬금없는 전화를 했다.
“야, 지금 텔레비전 틀어봐, 3번”
“왜?”
“거기 우리 간데 나와”
“그거 보라고 전화한 거야?”
“어. 거기 개그맨 00 이가 갔는데, 우리 간 코스랑 똑같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이면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면 가족을 사랑하는데도 시간과 노력과 돈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를 가장 가치 있고, 마음 편하게 쓰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엄마와 수학여행을 가본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엄마와의 여행에서 고려해야 할 것.
1. 캐리어를 끌고 10 발자국 이상 걷지 않는다.
엄마와 여행을 떠날 땐 첫째도 동선, 둘째도 동선, 셋째도 동선이다.
무쇠 냄비를 번쩍번쩍 든다고 체력이 강한 게 아니다.
무거운 짐을 끌고 낯선 도시를 헤매는 건 절대 금물.
아무리 여행책자에서 쾌속 전철이나 편한 시내버스라며 권하더라도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할 때는 공항 게이트 바로 앞에서 숙소 앞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리무진 버스, 택시를 이용하자.
외국에서 일이만 원 아끼려다 돌아와서 일이 년 욕먹는다.
숙소도 마찬가지.
에어비앤비나 한국 민박까지 숙소도 다양해졌지만.
이 둘은 대게 역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가에 위치해있고, 찾기도 쉽지 않다.
특히 에어비앤비는 엄마가 이역만리까지 가서 밥을 할 가능성이 높다.
역 근처 5분 이내 호텔이 최고다.
2. 무조건 조식 신청
부모님과 간다면 조식은 필수다.
엄마들은 아침을 드시는 습관이, 그것도 일찍 드시는 습관이 있다.
숙소 주변에 아무리 식당이 많아도 현지 식당이 문을 여는 건 10시 이후다.
아침을 먹어야 오전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데, 이러다간 시간만 버린다.
전날 음식을 사다가 호텔 룸에서 먹는 방법도 있지만, 대충 먹을 공산이 크다.
이럴 경우 점심을 시간 맞춰 12시에 먹어야 하는데,
현지인들이 붐비는 시간에 점심을 먹는 것은 좀 불편하다.
편안한 서비스를 받을 가능성도 적어지고.
이럴 바엔 호텔 조식을 배불리 먹고, 점심을 1시쯤 먹는 것으로 조정하는 편이 낫다.
3. 성(城) 보다 마트
엄마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이국적인 볼거리는 이틀이 지나면 거기서 거기가 된다.
이 성이나 저 성이나, 이 절이나 저 절이나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대형마트 쇼핑이다. 엄마들은 대형마트와 시장을 좋아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만큼 엄마들은 그 나라의 양념과 식재료, 물건들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 보고, 만지고, 먹어보는 생생한 체험은 덤.
마트나 시장에선 지갑을 열자.
명품 백 사주는 것 보다 엄마가 신기해하는 간장이며, 양념, 커피를 잔뜩 사주는
것이 가성비 갑이다.
아이들이 좋아할 관광열차, 뱃놀이 같은 체험과 여친이 좋아할 카페도 잊지 말자.
엄마도 여자고, 늙으나 젊으나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