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스. 1-1.

1. 세계.

by 콜라한잔

세계. 선험적인 것. 주어지는 것. 접촉되는 것. 알게 되(었다고 믿게되)는 것. 살게 되는 것. 죽게 되는 곳.


세게는 언제나 수동태다. 그 속성을 탐구하거나, 그 효과를 조사해보더라도, 언제나 그 끝에서 우리는 불쾌하도록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역사라 불리는 것. 흘러오기도 하고, 끊어 말라 사라지기도 하는 그것. 그 흐름에 휘말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세계는 왜 내 앞에 있을까?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 세계는 우리 앞에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싶다. 앞의 잔혹한 결론에 대한 찬동과 반박은 뒤로 하고, 잠시 사적인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 내고 싶기 때문에.


나의 10대는 가히 뜨거웠다. 체 게바라, 노무현, 전태일, 마르크스, 이제는 불꽃의 대명사로 굳어진 이름들 아래에서 나는 언제나 분노했다. 혁명가라는 칭호를 위해서도, 악날한 자본 권력의 실체를 폭로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런 거창한 칭호를 가지기에 나는 너무나 조그맣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인간이 만들어낸 기이한 생활방식에 토를 달고 싶었다. 그러니까 계급과 차별, 착취와 죽음, 분노와 절망. 이런 감정들에 누구보다 민감했을 뿐이었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논리적으로 이해한다기 보다는 '그냥' 화가 났다. 그 시절 나에게 세계는 능동태였다. 아니, 오히려 사동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역사라는 강물의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흙과 바위를 상대하는 단독자. 물길을 뚫고 강물을 움직이는 선발대. 적어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런 존재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찾았던 곳이 책이었다. 앞선 천재들의 고민들. 더 나아가, 조약한 분노에 불과할 수 있었던 나에게 합리와 이성을 통한 세계관을 보여주었던 학자들의 곁에서 나는 그들과 토론하고 논쟁했으며, 학생의 끝이라 볼 수 있는 입시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 막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가까웠다. 내가 꿈꿔웠던 새로운 세상이, 그리고 그 속에서 웃음 짓는 내 모습이.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대학생으로서 들은 첫 수업. 첫 철학 수업의 첫 시간에 나는 흄을 '제대로' 만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나만의 성인식이 시작되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 세계와 우리의 관계. 자칫 착각하기 쉬운 이 관계의 핵심은 믿음이다.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검증된 명제도 철학의 영역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추론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절대적 진리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과학은 무너진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면, 과학이 사용하는 수학이라는 용어 역시 불완전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2차원적 평면에서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밝혀진지는, 그래서 절대적 수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이 밝혀진 지는 1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이성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일까. 결국 인간의 모든 추론은 아무것도 증명될 수 없다. 다만, 각자의 경험과 배경을 토대로 가장 친숙하게 느껴지는 방법을 택하고, 그것을 믿으며 살아갈 뿐인 것이다.


이것은 정치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존엄하다', 과연 그런가? 아니라면, 그 질문은 도덕적이지 못한가? 그런데, 애초에 도덕이란 것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법률은 어떠한가. 우리는 흔히 도덕은 정서적이고, 법률은 합리적이라는 근거하에 이 둘을 분리하여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법의 근본이 되는 헌법의 조항들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명령할 뿐이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 도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기대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도덕은 허구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욕구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되는 한낱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도덕은 허구가 아니다. 동일한 정서를 느끼는 사람이 다수를 넘어가는 순간, 그 사회는 다수의 주장을 (그것이 가변적인 믿음이라 할 지라도) 효율적으로 실현할 정부를 구성하고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택하던지 결론을 하나다. 가치는 인류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계속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기꺼이 시지프스의 삶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위와 같은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다양화되고, 절대적 기준이 상대적 취향으로 극적인 전환을 벌이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격고 있는 혼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타나토스.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