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스. 프롤로그.

20대, 찬란한 나의 죽음을 위한 나만의 성인식

by 콜라한잔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성인식을 저마다 독특한 성인식을 가지고 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발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혼자 서는 시기. 부모를 통해 관계하던 세상을 스스로 느끼고 만져야 하는 시기. 이 순간을 미리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하고, 성인이 되는 개인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일종의 의식은 공동체의 단합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 형성에도 상당히 중요하다.(참고자료:https://youtu.be/_bXBunuqb1Q) 하지만 동시에 이 전환이 가져오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책임과 불안은 때때로 우리를 흔들고는 한다.


현재의 한국과 한국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포스트 모더니즘과 냉전 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 불리는, 지금 여기, 21세기라는 시대에서, 때때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포기하고 한낱 소비자로서 자아를 충족시키고, 그것을 자랑하듯 떠벌리고 다니곤 한다. 자기 증식이 목적인 자본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움직이며, 그로부터 뻗어나오는 모든 권력은 어느새 문화라는 이름으로 변해 현대인을 부유시킨다. 정말로 슬픈 것은, 때때로 우리는 그 틀안에 갇혔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서로를 혐오하고 단죄시키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있어서 20대의 시작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미리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현재 우울증을 앓고 있지 않으며, 자살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런 말을 미리 하는 이유는,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차용해 공감을 얻으려는 얄팍한 속임수 따위는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이것이 혹여나 실제로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물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왜인지, 나에게는 삶과, 이 삶을 둘러싼 체계에 대한 강렬한 에로스는 이미 거세되어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강렬한 죽음의 타나토스였고, 그동안 이것으로부터 도망쳐왔던 세월을 반성하며, 오늘부터 단편적으로 나의 타나토스를 마주하고자 한다.


결국 나만의 성인식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연재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꾸밀 생각도 없고, 연재도 내 마음대로 할거다.


세계, 자아, 타인, 사랑이라는 주제. 다만, 그 줄기는 하나일 것이다. 불완전한 삶보다 완전한 죽음이 옳지 않냐는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탐구. 아마 그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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