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꽃마차 (진방남)
처음 먹어본 음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내게는 농심 육개장 컵라면이 그랬고, 마산 성안백화점 표 초콜릿이 그랬고, 어른이 되어서는 홍어도 그랬다. 미각과 후각, 시각, 청각 어딘가를 자극한 최초의 인식은 뇌의 어딘가에 아로새겨져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삶의 자양분으로 쓰인다. 그 자양분 가운데는 트로트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참 바빴다. 두 분이 같은 일을 했기에 같은 시간에 나가서 같은 시간에 들어왔고, 육아라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맡아왔다. 20대 중반이었을 엄마 아빠는 지금의 나는 절대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가장과 부모의 역할을 잘 해냈지만, 그럼에도 둘째인 내가 원하는 애정의 몫이란 늘 부족했다. 나는 늘 엄마가 보고 싶었고 아빠가 보고 싶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엄마 아빠 두 사람이 나를 지켜봐 주는 순간이 늘 고팠다. 밖에 나갔다 오면 엄마 아빠가 있길 바랐다. 어떻게 생겨난 구멍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음에는 늘 허기진 공터가 있었다.
그런 어린 시절 가운데 내가 충만하게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전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그 순간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주현미 노래를 기가 막히게 '뽑았다'는 그 순간 말이다.
엄마는 지금도 곧잘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 불렀는지 지금도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문제의 노래는 <비 내리는 영동교>와 <신사동 그 사람>. 그리고 잘한다, 잘한다 칭찬에 힘입어 <짝사랑>이며 <러브레터>며 이후 발매된 주현미의 곡을 대부분 따라 불렀다는 것이 엄마의 증언이다. 엄마의 기억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상상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엄마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의 표정은 사랑, 그 자체였기에 나는 그 말을 그저 믿기로 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면 엄마는 어린 딸을 지긋이 지켜보고 목소리를 들었겠구나, 정신없이 바빴던 삶의 와중에도 딸의 재롱에 가끔은 웃음 짓는 순간이 있었겠구나, 그런 순간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트로트가 가져다준 행복한 순간은 또 있다. 전술한 것처럼 아빠는 차 안에서 늘 트로트를 들었는데, 부모가 아이를 태우고 어디론가 가는 일은 여행이거나 명절이거나 하는, 희로애락으로 치면 '희'에 가까운 상황이 많았을 것이므로, 트럭에 몸을 실은 그 순간을 나는 대부분 '행복'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차를 탄다, 트로트를 듣는다, 오늘은 좋은 날'이라는 흐름.
그렇게 차 안에서 들었던 노래들은 조금의 끊김도 없이 흘러나오는 뽕짝일 때가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느린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때부터 귀가 쫑긋 섰다. 나훈아의 <갈무리>나 <녹슬은 기찻길>을 10세 이전에 마스터할 수 있었던 것도, <목포의 눈물>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귀국선> 같은 전쟁이 남긴 상처의 조각을 감싸안는 노래들을 전쟁도 겪지 않은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아빠의 트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은 노래는 <꽃마차>다. 원곡 가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그 노래는 아빠가 가장 열성적으로 따라 불렀던 노래였다. <꽃마차>는 작곡가일 때는 반야월, 가수일 때는 진방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의 노래가 원곡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들었던 <꽃마차>는 여자 가수가 부르는 <꽃마차>였고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아마 이미자일 듯 하지만).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
아카시아 숲 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
하늘은 오렌지색
꾸양의 귀걸이는 한들한들
손풍금 소리 들려온다 방울 소리 울린다
아빠가 <꽃마차>를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꽃마차>를 좋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수많은 노래 중에 이 노래가 유독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내가 <꽃마차>를 좋아한 것일 테다. 노래와 함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던 젊은 아빠의 옆모습 같은 것을 보면서, 가족의 꽃마차는 달렸을 것이다. 그 꽃마차 속의 시간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행복으로 아로새겨질 것이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아카시아 꽃만큼도 상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