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마>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로마>는 <그래비티>, <칠드런 오브 맨>, <위대한 유산> 등을 연출한 멕시코 출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다. 지난 해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올해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쿠아론 감독의 유년시절을 자전적으로 담은 작품으로, 1970년대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다. 제목 ‘로마’는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라, 그가 자란 멕시코 시티의 부유한 동네 이름이며, 주인공 ‘클레오’는 실제 쿠아론을 길러준 입주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영화는 멕시코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가 인종, 자본, 사회적으로 억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집의 네 아이는 클레오를 엄마처럼 따르고, 클레오는 그들을 마음으로 기른다. 주인집 남편의 외도로 가정엔 균열이 일어나는 한편, 클레오는 아이를 임신한 와중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하는 고충을 겪는다. 주인집 아내 소피아는 시종일관 클레어에 ‘고용-피고용’의 권력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원치 않던 임신에 해고를 우려하는 클레오를 병원에 데려가 따뜻하게 보살핀다. 소피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분열은 깊어지고, 클레오는 사산한다. 힘들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나게 된다. 바다에 떠내려갈 뻔한 두 아이를 위해, 수영도 못하는 클레오가 거친 파도를 가르고 아이들을 구하며 가족과 클레오의 사랑이 깊어진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클레오가 네 아이들을 보살피는 묵묵한 사랑이 돋보이는 영화다. 비록 벌이를 위해 하는 ‘업’일 지라도, 그들은 진정한 가족이 된다. TV를 보던 조그만 꼬마 아이가 클레오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는 장면이 묘하다. 이 영화가 감독 자신을 키워준 그녀를 위한 자전 영화라는 것을 알고 봐야 더 감동적이다.
한편, 영화가 갈등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단연 여성들의 ‘연대’에 있다. 갈등 속에서 그들은 연대한다.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나름의 고충 속에서. 궂은 집안일 사이사이 두 가정부가 간간히 나누는 잡담. 임신한 클레오가 검진받도록 해준 소피아. 총기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양수가 터진 클레오를 안전히 병원에 데려간 할머니. 극이 진행되고 상황이 악화될수록 그들의 연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남자친구를 찾으러 간 어느 무술 수업에서 클레오가 교수의 말에 따라 “우습지만 힘든 자세”를 시도했을 때, 남들과 달리 그녀는 단번에 성공한 것처럼. 그들은 고난을 겪으며 강해진다.
그들의 연대를 ‘여성’에 방점 찍어 볼 의미가 있다. 1970년대 멕시코 사회의 낮은 여성 지위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보다 그들이 여성이기에 자연히 가지게 된 어머니로서의 책임에 주목해보자. 영화 전반의 축이 되는 클레오의 ‘임신-출산’ 서사를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원치도 않던 임신을, 남자친구 없이 혼자 견뎌야 했음에도, 클레오는 아이의 가구를 보러 가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간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생명을 잉태할 수 있음에 스스로 가져야만 했던 책임이었다. 죽은 채 태어난 아이를 구태여 두 손으로 안으며 흘리는 뜨거운 눈물에서, 본능으로써 가진 그녀의 모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클레오가 아이들을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은 출산의 과정에서 시작된 그녀 모성의 재발현이다. 이 맥락에서 영화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적인 책임감의 근원이 바로 출산의 과정에서 본연히 얻게 된 모성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가정과 아이를 지키고자 했던 책임은 모성이라는 지극히 여성적인 본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숭고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들은 연대하고, 서로 돕는 것이다.
그들이 모성이 부여한 책임에 연대해야 했음은, 그만큼 그 무게가 크기 때문이다. 클레오 없이 소피아는, 소피아와 할머니 없이 클레오는 견디기 힘들었을 무게다. 클레오는 아이들을 구한 후, 갑자기 사실 아이를 임신하기 원치 않았다며 뜻밖의 고백을 한다. 처음으로 클레오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 장면이고, 영화의 감정 또한 절정이 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처음 감상했을 땐,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구하고 사랑이 벅차오르면서, 그동안 숨겨온 억압된 감정을 이제서야 터뜨리듯 고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앞의 맥락에서 되짚어보았을 때, 원치 않지만 낳아야만 하고, 힘들지만 구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위치에 아직은 익숙치 않은 그녀가, 자신의 힘듦을 알아 달라는 듯 털어놓는 하소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는 클레오를 따라다니며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관찰한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때문에 관조자가 된 것만 같다. (사실 영화 초반에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클레오가 영화 초반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것부터 영화 후반 결국 사산하기 까지니까, 일 년이 넘는 시간을 2시간에 담은 것인데, 시간이 흘렀다는 별다른 암시 없이 이야기가 계속된다. 이 때문에 영화가 관조하는 것이 기승전결로 잘 짜여진 극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들을 겪은 후에 돌아 본 삶 속에서 조금씩 더 특별했던 단면 하나하나라는 듯한 인상이 든다.
특이한 것은 주인공이 구조적으로 처한 사회적 위치 외엔, 70년대 멕시코의 사회상이 영화의 서사와 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특정 시대와 사건들이 묘사되는 영화들은 대개 그 사회 맥락 속에서 인물이 갈등하는 이야기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말이다. 지진과 산불이라는 재해가 등장하고, 학생 시위와 이에 대한 무력 진압이 일어나지만, 큰 동요 없이 해프닝처럼 지나가고 만다. 이 영화에선 이러한 사회적 맥락이, 특정한 재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나, 사회에 용감히 맞서 싸운 이야기처럼, 적극 활용되지 않는다. 그저 그녀와 함께 묘사될 뿐이고, 클레오는 영화 속 특정한 사건에 눈에 띄는 태도 변화를 겪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영화는 평범한 소시민이 그때그때의 사건들을 덤덤히 지나온 역사에 가깝다. 개인사 전체로 보면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하다. 일련의 사건들은 이것이 바로 ‘그 당시 그곳’의 이야기라는 표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관객들이 겪지도 못한 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은 톡톡히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시종일관 클레오를 관찰하던 카메라가, 그녀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클레오에서 바깥으로, 또는 바깥에서 클레오로, 느리게 시선이 이동하는 지점들이 있다. 마치 “그 사건들 속에서 살아갔다”라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이 인상적인데, 집 안에서도 자주 쓰이지만, 클레오가 상점에서 가구를 보던 중 카메라가 갑자기 창밖으로 움직여 무력 싸움을 비추는 장면, 양수가 터진 후엔 혼돈이 된 거리에서 병원을 가기 위해 숨어서 이동하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살아가고자 했음’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영화는 단순히 클레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을 살아간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로마>는 수미상관이다. 비행기로 시작해서 비행기로 끝난다. 개인적으로 수미상관을 너무 좋아하는 데다가, 클레오가 처한 상황을 극단적으로, 또 천재적으로 표현한 장면들이라 감탄스러웠다. 첫 장면의 비행기는 클레오가 복도를 거품내 청소하는 중, 바닥 타일 위 물 웅덩이에 비친다. 열심히 집 안에서 바닥을 닦고 있는 클레오와 대비되게, 바닥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애석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마지막 장면의 비행기는 여행에서 아이들을 구한 영웅이 되어서 돌아온 클레오가 방으로 올라가며 나오는데, 그녀를 비추는 극단적인 로우 앵글에서, 클레오 뒤 하늘 위를 지나간다.
영화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정부 클레오의 지극히 평범한 삶, 평범한 사랑, 평범한 희생을 노래한 헌정시 같다. 척척한 생활을 짓궂게 들춰내듯 날아가던 비행기를 통해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을 시작한 영화는, 묵묵히 살아간 그녀의 삶을 회고한 후, 깨달은 듯 이를 위로 받든다. “그 속에서” 살아간 모두의 평범토록 고결한 삶을 응원하며 그들을 하늘과 같이 올려다보며 끝을 맺는다. 로마의 한 가정부였던, 위대한 어머니였던 리보에게, 세계 곳곳에 있는 클레오에게 바친다. “Para Li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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