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보고픈 첫사랑
창가 자리에 앉기 좋아했던 여고 시절, 열어 둔 창문 틈으로 낯선 향기가 불쑥 들어왔다.
‘설마 꽃향기? 여기는 2층인데?’
수업이 얼른 끝나길 기다렸다. 계단을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1층 화단, 더 짙어진 향기의 근원이 보였다. 바로 곁에 서지 못하고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췄다. 경이로움.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이 생애 처음으로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순간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평범한 남자, 마치 고전 영화 속 정지 장면처럼 나의 첫 꽃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깃 세운 유럽 귀족 드레스처럼 단정하고 도톰한 꽃잎. 웜 화이트 실크 빛깔의 신비로움. 매일 아침 누군가 대신 공들여 닦아 둔 구두처럼 광택 있고 반듯한 잎사귀까지. 무엇보다도 강렬한데 머리 아프지 않고, 말단 폐 세포까지 채우려는 사람처럼 깊이 들이마시게 되는 향은 매일 나를 화단으로 불렀다.
하나둘 꽃이 떨어지던 아쉬움까지 생생하다. 꽃을 따도 될까 며칠을 망설였다. 마지막 꽃이 지기 직전, 큰맘 먹고 가지에서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옮겼다. 다이어리에 끼우고 덮을 때면 숨을 훅 들이마셨다. 한 번씩 들여다보면 종이에 배어든 향이 반겨 주었다. 여름, 가을, 겨울날에도. 덕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꽃이란 의미 있는 기다림이고 의심할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대학생이 되어 시작한 서울에서의 첫봄. 지방보다 훨씬 볼거리도 즐거울 일도 많았지만, 4월이 되자 문득 뭔가 있어야 할 존재가 없다고 느꼈다. 치자나무였다. 캠퍼스에서도 서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해 봄이면 허전했다. 십여 년 후에야 꽃 시장에서 찾아냈다. 내 마음을 그대로 적은 픽이 꽂혀 있었다. ‘비교 불가 향기’.
사람에게 가장 오래 기억되는 감각은 후각이라고 한다. 그해 봄의 치자나무를 생각만 해도 코끝에 번호처럼 정확한 향기가 불쑥 파고든다. 잘 있을까, 지금도 있을까, 다시 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첫사랑을 떠올리며 할 만한 말을 읊조리곤 한다. 첫 꽃 사랑이 이토록 그리우니, 내 삶은 그 시절 끼워 둔 치자꽃 향기가 종이마다 은은히 배어든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잊을 수 없는 처음.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중력을 벗어날 수 없듯 그 지독한 이끌림이 결국 나를 꽃으로 불러들였다. 강렬한 기억은 긴 시간과 깊은 고통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 있다. 감정이 난파선처럼 고꾸라지는 날도, 아이를 낳아 처음 얼굴을 봤을 때를 생각하면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지어지듯이.
엄마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말 중 TOP3를 꼽는다면 ‘저 혼자 여행 왔어요.’가 꼭 포함되지 않을까? 나라면 어디 갈까, 생각해 보다가 마음의 비상약을 하나 만들었다.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널 찾아가야지. 상상만으로도 편안하게 설레는 익숙한 그리움 한 알. 처음이라는 성분은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