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거짓을 말할 수 있는 문장
이 땅의 고등학생들에게 수학은 절망감을 안겨주는 존재다. ‘영포자’와 ‘언포자’도 있지만 내 추측으로는 국내 모든 포자들을 다 합쳐도 ‘수포자’의 수를 뛰어넘기 힘들 것 같다. 보통 고등학교 진학 후 ‘인수분해’, ‘나머지정리’, ‘무리수’ 따위를 배우면서 점점 수포자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테크트리의 정석인데, 이미 ‘허수와 복소수’가 등장할 쯤이면 수학에 대한 GG선언이 멀지 않았다고 봐도 좋다.
헌데 이런 수포자들에게도 한 가지 자신 있는 분야는 있다. 그것은 바로 ‘집합과 명제’.
사실은 수포자일수록 오히려 집합과 명제를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합과 명제만 수십 번, 수백 번을 풀어왔기 때문이다. 집합과 명제의 다음 장인 ‘실수와 사칙연산’부터 예비수포자들의 멘붕이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매번 그들은 실수와 사칙연산을 공부해 보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처음부터 하면 나아지겠지 싶어서 순천만 철새도래지를 찾는 제비처럼 수학의 정석 맨 앞장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자신이 소싯적에 수포자였었다면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한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야, 솔직히 집합과 명제는 내가 전교에서 제일 잘한다.”
이런 과정을 수십 번 거친 끝에 그들은 그야말로 집합과 명제에 있어서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마치 서태웅이 수만 번 연습한 자유투를 눈 감고도 넣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집합과 명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뜬금없이 문제!
"개발에는 땀이 난다."
이 문장은 명제인가?
집합과 명제의 달인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다들 이 문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연히 이 문장은 명제이다.
명제는 ‘A는 B이다’, 교과서식 표현으로는 ‘A→B’와 같은 형식을 갖춘 문장을 말한다. 또한 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참, 거짓, 역, 이, 대우… 다들 기억하리라 믿는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이걸 기억하다니… 마치 서태웅이 된 기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 문제!
위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정답은 거짓이다. 개발에는 땀샘이 없다.
혹시나 이 답변에 의심이 든다면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라. (미안해, 다음카카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에 이 명제를 보고 참인지 거짓인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명제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무조건 개발에는 땀이 난다. 속담도 있잖은가!”라고 계속해서 내 의견만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나의 부족한 지식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이상을 계속해서 주장한다면 거짓말쟁이나,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정신병자 취급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참과 거짓이 분명한 명제가 아니라 가치판단의 영역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개발보다는 내 발이 더 귀엽다."
이런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본인은 개발보다 자기 발이 더 귀여워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릴 것이다.
사회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거의 모든 이슈 역시 명제가 아닌 가치판단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명제보다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본인의 주장을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보인다. 확실하게 참이나 거짓이라고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참’이라고 관철시키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원빈은 강동원보다 더 잘 생겼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일반적으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경우에 사람들은 해당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것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분야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경향은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즉,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경험을 통해서 ‘아, 내가 생각했던 게 틀렸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참’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납득이 가는 반박을 듣기 전에는 당연히 기존의 신념을 고수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명제가 아닌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특정 문제에 대해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유념해야 할 점은 자신의 생각이 어떤 관점에서 봤을 때는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 역시 어떤 계기로 인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이성적으로 설득되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일이다. 물론 심정적으로만 따지면야 왠지 모르게 더러운 느낌이 들겠지만(이해한다. 나는 토론에서 지면 기분 더럽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그 ‘패배’ 덕분에 더 합리적인 신념을 갖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무조건 참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으려고 한다. 그들은 전체집합 내에서 교집합이나 다른 집합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집합이 아니면 ‘여집합’일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합이 참이니까 여집합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명제’가 아닌 가치판단의 문제에서 참, 거짓을 나누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실제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집합이 있으며 그 집합들이 만들어내는 더 많은 수의 교집합이 있다.
그러니까 명제가 아닌 문장에는 관용의 태도를 보이자. 우리가 주로 싸우는 문제들은 명제가 아니고, 애초에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없는 문장이니까.
주장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주장을 무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토론과 논쟁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고, 폭력을 가하지 말자는 것이다.
토론과 논쟁은 자기 할 말만 앵무새처럼 하는게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타인의 발언권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억압한다면 꼰대나,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정신병자 취급을 면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