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부지런할 때면 밤마다 책가방을 싼다. 책가방엔 '꼭' 필요한 것들만 넣는다. 기본적으로 가방엔 필통, 안경집, 칫솔치약세트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맨 먼저 노트북과 충전기를 넣고 들고 갈 책을 고른다. 책은 지하철에서 읽으면 폼 날 것 같은 고전 소설 한 권, 두꺼운 전공 서적 한 권. 왠지 오늘 적을 것 같은 일기장도 넣는다. 환경을 생각해 플라스틱 물병도 넣는다. 언제 한 번은 누나가 내 가방을 들어 보고는 "행군 가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당연히 "학교 간다"고 답하고 집 문을 나섰다.
매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니지만 내용물을 써먹는 일은 거의 없다. 학교 가는 지하철을 타면 가장 먼저 가방을 벗어 짐칸에 올려 둔다. 아쉽게도 고전 소설은 매번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전공 수업 때 전공 서적을 펼쳐본 적이 많이 없다. 수업이 다 끝나고 도서관에 가면 할 과제가 있어 일기는 제일 나중으로 미룬다. 제일 나중으로 미뤄 일기를 쓰지 않은지 한 달이 좀 넘었다.
언제부턴가 내 가방이 무거워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전 소설을 놓고 오는 날이면 괜스레 지하철 안에서 책이 읽고 싶다. 전공 서적을 두고 오는 날에만 꼭 교수님께서 전공 서적에 중요한 부분을 알려주시고 밑줄을 그으신다. 물병을 씻고 깜빡 가져오지 않은 날이면 괜히 물이 마시고 싶다. 아 참, 안경집. 오늘은 안경집을 가져오지 않아서 안경알이 내내 뿌옇다.
요즘 낭만이 무언지 생각해본다.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비이성적이고 쓸데없는 것들. 나는 낭만이 바보 취급받는 시대에 산다. 낭만이 없는 시대보다 낭만이 바보 취급받는 시대에 사는 것이 얼마나 슬픈가에 대해 생각한다. 가방에 고전 소설 한 권 넣지 않고 사는 세상. 그런 사람들이 얼뜨기 취급받는 세상.
대학 신입생으로 돌아간다면 미식축구 동아리를 해보고 싶다. 낭만으로 부딪히고 넘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