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소설이나 영화가 허구를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이 곧 허구라는 편견은 지나친 비약 같다. 허구(fiction)는 소설 속에서 서사, 곧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기법일 뿐이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 '괭이부리말 아이들' 등을 보면 시대적 배경(제주 4ㆍ3)과 장소적 배경(제주도, 만석동)이 실제 사실에 기반하고 있고 그런 소설들도 적지 않다. 그러니 소설을 단순히 허구의 표상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없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랜선 여행이다 뭐다 하며 인터넷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SNS와 유튜브는 필수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독서를 통해, 작가가 펼쳐놓은 여행지를 여행하고는 한다. 참 괜찮은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이 누구를 이야기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그저 먼저 이야기의 길을 나선 한 명의 선배 여행자 같다. 선배 여행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그들이 먼저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거나, 혹은 참고하여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다. 독자라는 후배 여행자들은 그저 선배 여행자들이 적어놓은 그 길과 과정에 대한 고충을 읽고 공감하며 혹은 다른 생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독서만큼 비슷하게 좋아하는 게 있으니 영화와 음악이다.)
현실의 세계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맺어나가며, 빠른 결정과 행동을 해야 한다. 늦으면 큰일 나는 사회다. 그런데 독서를 한다는 것,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속독이 통하지 않고, 오직 느릿느릿하게 정독으로만 집중해야 하는 독서법을 요한다. 나에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내 생각을 멈추고, 조용히 뒤를 돌아보며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인에 대해 더 생각해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겉으로만 아름다운 묘사보다는 전체적으로 영화나 노래나 글을 하나로 끌어가는 "스토리텔링"을 중시하고 애정 한다. (김훈 선생님은 이미 묘사에서는 신급이고, 스토리 조차도 너무나 훌륭하고 탄탄함!)
그것은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과 태도에서도 해당되는 것 같다. 사람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본성이다. 나는 그 스토리가 나와 같은 맥락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좋다. 겉모습이나 말 혹은 글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서 보이는 하나의 스토리 라인. 그리고 작가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뚝심 있는 스토리텔링.
예전에 김영하 작가가 사람들이 소설을 통해 가장 크게 감동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감."
지극히 단순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대답이다. 나는 거만했다. 소설은 작가가 생각해낸 허구의 세계라고 단정 지어놓고, 무시해왔다니.
우리 청춘들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계발과 달콤한 위로를 주는 책에만 매달린다. 읽을 때는 좋지만, 책장을 덮으면 다시 현실이다. 독자에게 희망과 사이다 같은 조언을 해주는 책들도 좋지만 자칫 작가만의 편향적인 결론이나 지극히 착한 척 조언 (해결책이라며) 이 무의식 중에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이에 나는 삶의 은유를 보여주며 자신의 인생을 천천히 관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소설과 고전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추천한다.
지치고 좌절하는, 때로는 가슴을 찢어지게 만드는 현실이라는 드라마..
소설을 읽는 것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며, 결국 공감을 통해 나와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힘이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인생.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공감을 통해 마음을 위로받는 것. 내가 나를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삶.
소설 속 주인공들 조차도 삶의 녹록지 않은 어려움 앞에 쉽게 좌절하고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는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끝을 맺는 경우도 즐비하다. 그래도 그것이 인생이더라. 항상 어벤저스가 이기고 권선징악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더라. 이에 소설을 읽으며 다양한 상상 속 여행을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다시 힘을 낸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찾아내십시오.
그것이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펴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거부당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를 스스로에게
고백해보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돌고 돌아서 길게 이야기했다. 결국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는 거두절미하고, 이렇다. (다짐의 글이다!)
솔직히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너무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
전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고, 그냥 '좋은 독자'가 되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는 욕심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글을 알리고,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고, 누군가를 또 기쁘게 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 속에 녹여내며 하나하나 독자들이 찾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그런 글,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
감동感動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
논리적인 글이든, 감각적인 글이든, 그 어떤 글을 쓰더라도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반성하고 뒤돌아 보게 만드는, 그렇게 계속 읽고 싶어 지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벅찬 정도는 아니어도 은은한 감동을 받고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거기에 내가 꿈꾸는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모두의 삶'을 위해 나의 희망을 넣어서 정말 훌륭한 소설들을 써보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분야는 우리 사회 도처에 널려 있는 예민한 사회 문제를 냉철하게 꼬집고 비트는 소설, 그리고 인간의 그 흘러가는 삶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고찰해보는 내용을 담은 따뜻한 소설,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그렇게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흘러 나아가는 강물이고 싶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 물을 떠다가 필요한 곳에 생명수처럼 뿌려줄 수 있는 마음이 들게 만들고 싶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는 그 부당하고 비도덕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개인을 조명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공감하며, 분노와 감동, 그리고 기쁨과 슬픔 그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는 것. 그것은 사회고발 에세이 외에도 오직 소설만이 이야기를 더해 풀어낼 수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독자들이 받아들였을 때, 신문 기사나 뉴스 보도를 통해 접할 때마다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그 사회의 일들이 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고, 내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스토너>를 읽으며 더욱 확신에 차게 되었다. 나도 극적인 드라마보다도 이러한 자연스럽고 평범한 내용들을 담담하게 다루고 싶다.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새계의 유물이며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연장을 잘 정리해서 미리 가지런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독서를 하며 발견하게 되는 좋은 어휘, 문법, 명언, 사자성어 등을 노트에 적어서 틈틈이 정리하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 할 수 있다!
예술가란 계산하거나 세는 것이 아니고,
수목처럼 성숙하는 것입니다.
수액=목은 그 수액의 흐름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날의 폭풍우 속에 유유히 서서
혹시 여름이 안 오는가 하고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여름은 꼭 옵니다.
그러나 여름은 마치 눈앞에 영원이 있는 듯
아무 근심도 없이 조용히 드넓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인내심 강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옵니다.
저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괴로워하면서도 배우고, 그 괴로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인내야말로 전부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글을 마치며
약간 옆으로 새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다.
웹을 통해 작가가 될 기회와 자신의 글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나 질적 성장에서 예전의 책과 작가들만큼의 혁신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요새는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생겨나고 있고, 개별적으로는 좋았던 글들이 종이책으로 묶어놓으니 뭔가 어수선하게 통일성 없고, 너무나 상투적인 말들과 은유가 가득한 책들도 많다. 흥미는 있지만 지속성이 없거나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글인지 알 수 없는 글들, 특히 젊은 작가들의 에세이와 소설 속에도 수두룩하다.
‘이야기’의 목적이 ‘흥미’에만 갇혀 있고, 휴대폰 화면을 통한 가독성에 중점을 둔 글들은 결국 그 작은 화면의 크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시적인 진통제 같은 효과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주제가 전체를 관통하는 진정성이 필요로 되는 시점이다. 대문호들은 작품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혼을 갈아 넣어 진정성 있는 글을 눌러 담은 책을 내놓지 않던가!
며칠 전 서울 국제도서전을 다녀왔다. 예년 같았으면 활기 넘쳤을 공간들이 지금 텅텅 비어 가고 있다.
그저 많은 독자분들이 종이책, 그리고 동네서점까지 하나의 문화 핫플레이스로서 즐겨주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수많은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서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를 바라고, 우리 독자들은 그런 좋은 작품들을 향해 아낌없는 응원과 존중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또 그 좋은 작품 속에는 언젠가 내가 내놓을 글이 포함되기를 살짝 희망한다.
얼마 전에 읽은 유쾌한 에세이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요즘 핫한 태재 작가의 "책방이 싫어질 때")
살짝 가공해서 적어본다.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이런 마음가짐을 항상 갖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길을 제시하는 등대보다는 바다에서 방향 없이 표류하고 있는 배들에 식량을 전달하고 함께 나아가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을 지속하고 싶어요.
살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글, 그리하여 또 다른 이야기와 인연이 만들어지는 글이길 바랍니다."
끝으로 소설가 <위화>가 방한했을 때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좀 가져와봤다. 이 인터뷰 글을 공유하며 마친다.
이 글은 글쓰기를 희망하는 미래의 작가님들 모두가 생각하고 가슴에 담아두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위화의 소설에는 절망 속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고, 인간 삶의 다채로운 면을 조명한다. 그것이 큰 매력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점도 있을까. 내 작품을 이렇게 읽어달라, 고 하는.
20년 전에 <인생>이라는 작품을 썼다. 솔직히 사람들이 그 작품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웃음) 작년에 중국에서 130만 부가 팔렸다. 매년 100만 부를 찍는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늘 즐거운, 향락적인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의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처음 작가가 됐을 때 소설가의 의무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일을 잘하면 된다, 그것이 의무다,라고 생각했다. 소설가로 살아온 지 30년이 되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용감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작가로서 중국 정부의 말을 따르게 되면 설령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더라도 작품이 그에 따라가게 된다. 작가의 현실감각은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를 갖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