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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ad재진 Dec 13. 2020

청춘의 이별 = 담담하게, 그리고 여운을 남기며

[인생영화 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부디 우리가 도망쳐온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결국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이동진 평론가}



몇 년 전 (예전) 여자 친구가 어떤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잔잔하고 좋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영화이고, 남녀 커플이 있는데 여자 주인공은 다리가 불편하고 남자 주인공은 바람둥이 대학생 같은데 서로 사랑하다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쿨하게 헤어지는 영화라고. 그때의 나는 그 영화에 관심 없었다. 계속 그 영화가 뭔지 몰랐다.


그녀는 잔잔한 영화들을 좋아했다. '러브레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도쿄 맑음', '비밀' 등등. 지금도 나처럼 그런 분위기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겠지. 취향은 변하기도 하는 건데, 나 혼자만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이번 주에 한지민과 남주혁이 나오는 일본 영화 리메이크작 <조제>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평은 극과 극이지만, 다음 주에 보러갈 예정이다. 그래서 그 원작이 무척 궁금했다. 지난 월요일에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했다. 원작은 2003년 개봉한 영화였다. 제목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때 말했던 영화가 이 영화였다. 일주일 동안 세 번을 봤다. 월요일에 보고, 수요일에 다시 돌려보고, 금요일에 또다시 돌려봤다.


처음 볼 때는 어떤 영화일지 괜히 두근두근했다. 보는 내내 뭔가 심플하고, '생각보다 야하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17년이나 지난 영화이지만, 의외로 촌스럽지 않고 풋풋했다.


두 번째 볼 때는, 혼자 주인공들에 감정이 이입되었다. 남녀 주인공들의 심리상태가 이해 안되었다.

"츠네오(자 주인공)! 조제에게 왜 마음을 제대로 표현 못하는 거야?!", " 뻔히 맘에 없는 말을 하는 모습 몰라? , "왜 쉽게 알겠다고, 수긍하고 포기하는 거야?!"


세 번째 볼 때는, 그들이 하는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밋밋해 보였던 바다여행 장면과 너무나도 평범한 이별 장면에서 혼자 벅차올랐다. 츠네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도로의 난간을 붙잡고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솔직히 나도 눈물 흘렸다.


흔히 이별을 하면 세상 무너진 것처럼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이 무너진 듯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이별은 한순간 오는 게 아니니까. 이별을 직감하는 순간은 반드시 있는 법이고, 있었다. 서로 그때는 두려움에 애써 부정하거나 자기 합리화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한동안 많이 듣던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동네 산책을 잠시 나왔다. 영화와 음악은 이래서 무섭다. 자꾸 오래전 지나간 영화를 다시 머릿속에서 상영해 주니까.




청춘의 만남, 사랑, 그리고 이별


영화의 내용은 매우 심플하다. 대학생이지만, 마작을 하는 도박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츠네오. 일상이 평범하기만 한 보통의 20대 청년이다. 도박장에서 도박꾼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동네에 유모차를 끌고 매일 아침 산책하는 이상한 할머니 이야기를 듣게 된다.


리고 어느 날 우연히 강아지 산책을 나갔다가,  할머니가 놓치는 바람에 혼자 내리막으로 굴러가서 부딪친 유모차를 발견한다. 깜짝 놀라서 뛰어가 보니, 그 안에는 조제(여자 주인공)가 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조제는 다리가 불편해서 혼자 걸을 수 없는 성인 여성이었고, 할머니가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을 시켜주시는 거였다.


할머니는 도와준 은혜를 갚고자, 츠네오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한다. 얼떨결에 따라가 얻어먹게 된 아침.

첨에는 떨떠름했으나, 계란말이를 한 입 베어 물고 그 음식 맛에 푹 빠진다. 그러면서 조제와도 처음 대화하게 된다.

몸이 불편하고, 가족이라고는 할머니 밖에 없고, 학교도 갈 수 없는 조제.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조제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단 하나의 도구이자 취미는 그저 독서뿐이다. 할머니가 주워온 많은 헌책들이 그녀의 방을 채우고 있다. 답답함에 매일 산책을 하고 싶었던 조제는 항상 나이가 많은 할머니를 조른다. 그래서 할머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침 일찍 조제를 태워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츠네오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미모의 후배들이나 예쁜 여자를 꼬셔서 데이트를 하고 인기도 많다. 츠네오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처지의 조제에게 빠진다. 늘 직설적이지만 솔직한 말을 하고 또 요리를 정말 잘하는 매력적인 조제. 둘은 다투기도 하면서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정말로 힘들어진 조제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츠네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 그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바래져 간다. 츠네오는 애써 부정하며 무덤덤하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조제는 그저 말없이 츠네오를 위해 이별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츠네오의 가족에게 같이 인사 가기로 한 날. 도중에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본다. 조제는 호랑이가 무서워서 츠네오의 손을 꼭 잡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면서 드디어 호랑이를 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그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두려운 것도 용기 내어 맞닥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세상에 맞설 용기를 얻게 된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 주는 장면.


그들은 수족관을 방문하지만, 하필 휴관일이다. 이상하리만큼 억지 투정을 부리는 조제. 그런 조제가 이해 안 되고 왠지 지쳐버린 츠네오. 차에 탄 둘은 다시 츠네오의 집으로 가려고 하지만, 조제는 내비게이션을 꺼버리고 바다로 가보자고 한다. 그렇게 도착한 바다.

 


조제 : 저기 반짝반짝하잖아. 저기로 가자.

츠네오 : 난 다 젖잖아. 넌 젖지 않지만.


이 바다여행을 끝으로, 그들은 다시 몇 달을 같이 살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이별을 한다.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조제는 학교에 가는 츠네오에게 선물이라며 야한 잡지를 무심하게 툭~ 건네면서 그 둘은 그렇게 이별을 한다.




길을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마지막 바다여행에서 그날 저녁 조제는 잠든 츠네오를 바라보며 독백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을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다 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서로 너무나 사랑했기에, 서로가 변해서 헤어질 때도 구질구질하지 않게 이별한다. 이별의 편지나 매달리는 것도 없다.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같이 행동을 한다. 물론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지고 나서 무덤덤하게 길을 걸어가다가, 끝끝내 오열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여자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조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미래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던 자기자신에 대한 눈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서로 후회 없는 사랑을 했기에, 애써 돌아선다. 이렇듯 어떠한 청춘의 담담한 이별은 향수의 잔향과도 같은 여운을 남긴다. 책을 펴야만 볼 수 있는,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특별한 문장처럼. 모든 사람들과, 보다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외로움을 연습해야 하고 익숙해져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다가 길에서 난간을 잡고 오열하는 츠네오
시간이 지나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서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조제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극 중 츠네오의 마지막 독백]






보통날이네요, 어느새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예전에 매일 같이 듣던 노래 두 곡을 플레이해서 들어보았다.  


G.O.D. 의 <보통날>과 박정현의 <미아迷兒>


특히 '보통날'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장면이 떠오른다. 뮤직비디오 속의 남자 주인공(이천희)은 이별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살아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때 내 모습 같아 보였다.




"아침이면 일어나 창을 열고,
상쾌한 공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한 손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든 채
만원 버스에 내 몸을 싣고
귀에 꽂은 익숙한 라디오에서
사람들의 세상사는 즐거운 사연
들으면서 하루가 또 시작되죠
화사하게 빛나는 햇살이 반겨주네요
.
.
.
널 잊어버린 기억마저 잊었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마치 사랑한 적이 없는 듯이

보통날이네요, 어느새......"



<중경삼림>, <러브레터>, <비포 선 라이즈>

내가  좋아하는 사랑 영화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애절하게 사랑했지만, 이별은 담담하게. 이별을 부정하고 매달리고 울고 불고 질척거리는 모습 없이 서로에게 진한 여운을 남겨주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청춘의 사랑과 이별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왔고.


현실은 말한다. 끝없이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에서, 혼자만 오래 멈춰있으면 그것은 뒤쳐지는 거라고. 그러니 길을 모르겠고 미아가 된 기분이 들더라도 그냥 움직여보라고. 시간의 여백은 정말 잠시 뿐이라서 반드시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도망가버린 그때의 시절과 기분을 쫒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피해 간다. 지금의 나는, 마음을 따라 걸어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눈 내리는 일요일 아침,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 글을 써본다. 예전에 좋아하던 노래들을 들으면서  그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노래를 다 듣고 책상에 앉아 책을 폈다. 며칠 전에 중고 서적으로 사 온 몇 권의 책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나의 시절을 떠올려본다. 시간이 흘러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던 순간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때도 최선을 다했고, 아직도 여운이 남아 멋있게 기억되고 있으니까. 사진속에는 그 예전의 우리들이, 그 청춘들이 환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오늘을 지내고 있을 너와 나. 커피가 다 식어버리기 전에 그냥 안부를 묻고 싶다.

 


"잘 지내나요,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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