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바로 "갑질"이다. 잊을만하면 갑질 사건이 터진다. 아침마다 신문과SNS를 통해 각종 갑질 사건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된다. '갑질'은도대체 무엇일까. 갑을(甲乙) 관계에서 지위, 직책, 재력 등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행위를 의미한다.
영문 신조어로도 'Gapjil'이라고표기되어있다.한국어 발음 그대로쓰인이 신조어는 말해준다. '갑질'이라는 말은한국사회에특화되어있다는사실을. 그룹 'BTS'와 영화 '기생충' 덕분에 드높아진 긍정적인 한류와는반대되는 개념으로, '갑질'이 우리말, 우리문화 세계화의 대표적인 나쁜 사례가 된 것만 같아서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양극화에 익숙해져가는 결과인가. 사람들은 그것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서열을 매겨놓고 본인보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을 하대하는 갑질을 행하고 있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에 의하면 갑질의 원인은 존비(尊卑)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문화정서적 경향성과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우월적 위치의 갑의 강압적 역할과 약자인 을의 저자세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즉,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상사, 군대, 선후배 등 수직적 상하 질서를 강조하는 폐쇄적 조직문화와 기관, 재벌, 고객 등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특권의식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조직 내부와 상호관계에서 갑질을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분위기가 반복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강박감으로 자기 조절 능력과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자아 고갈과 인격수양 부족으로 때문에 생긴 분노조절장애를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참고 : 매일신문]
"우리 아빠 누군지 알아?"
지금 한창 논란 중인 KTX 햄버거 갑질 여성이 피해자에게 뱉은 말이다. 2월 초, KTX에 탑승한 한 여성승객이 객실에서 엄청 큰 소리로 통화하며 마스크를 내리고 초콜릿 케이크를 먹었다고 한다. 그 뒤에 승무원이 마스크를 써달라고하자, 무시하며 햄버거까지 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래, 원래 목소리가 크고 또 배고팠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정말 조금은 이해해줄 수 있었겠다. (물론 코로나 19로 인해 모두가 큰 피해를 입고 있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방역에 동참하는 시기에 저 행동은 200% 잘못된 행동이다.)
참다못한 다른 승객(피해자=제보자)이 밖에 나가서 드셔 달라고 하자, 저 갑질 여성은 막말괴욕설을 시전 했다.
"내가 여기서 먹던 말던 네가 무슨 상관이야! 없이 생기고 천하게 생긴 X이. 우리 아빠가 도대체 누군 줄 알고 그러냐, 너 같은 거 가만 안 둔다"
기사를 보니 더 심한 말을 하고 SNS에 올리겠다며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이슈화 되자, 저 갑질 여성은 피해자에게 연락하여 '신경과민 상태에 공복이라서 더 민감했다, 반성한다'라며 사죄했다는데 과연 진심으로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까? 행태를 보아하니 이러한 갑질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로 주변인들의 제보가 쏟아지고 있음.) 저 갑질 여성은 피해자에 대한 인격모독 외에도, 공공안전을 해치는 행위를 했다. 어린아이들과 노약자들까지도 불편함을 감수하며 마스크를 쓰고 방역에 적극 협조 중인 상황인데, 저러한 안하무인격 행동들은 허탈하기까지 하다.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라는 갑질 여성의 말에서 예전 '정유라'씨의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라는 갑질 막말이 떠올랐다.
갑질 여성의 말에는 분명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으리라.
"우리 아빠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이고 공공질서 위에 우리가 있다. 아빠 딸인 나에게도 당연히 특권이 있고, 행여 위법을 했다고 해도 나는 유능한 변호사를 통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어~"
지금은 7080년대 군사정권 시대가 아니다. 비록 양극화는 갈수록 악화되고 살기 힘들어졌지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알고', '저항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서두에 언급한 사건들이 어떻게 밝혀졌는지, 지금 해당 인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저 갑질 여성은 모르고 있었나 싶다.
이제 네티즌들은 그녀의 그 '대단한 아빠'가 누구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KTX 안에서 햄버거 먹다가 나가서 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온 딸을 보며 그녀의 아빠는 대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전화를 받은 뒤에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취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얘야~ 공공장소에서는 예절을 지키고 방역규정을 준수해야지"
두 번째는 "어떤 인간이 내 귀한 딸을! 어디야!"
두 번째를 선택했다면 그분들은 권력을 누릴 자격 없다. 그런데, 두 번째가 맞을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공공예절을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라고 가정교육을 받았다면 갑질 여성은 절대로 막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의 '대단한 아빠'를 밖에서 증명서처럼 이야기했지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그 '대단한 아빠'를 욕되게 만들었다. 늦게라도 깊이 반성하기를 바란다. 인륜은 천륜이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그 말.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부와 명예, 권력이 높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까지 높여주는 것일까. 갑의 위치가 어느 날 순식간에 을의 위치가 되고 을이 언젠가는 갑이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뉴스에서 갑질 사건이 발생되면 혀를 차며 비난을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갑질을 하기도 하고 또 갑질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내가 하는 것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고 남이 하는 것만이 갑질이라는 내로남불식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젠가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세상을 함께 가꾸어 나가는 소중한 이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용서 그리고 타협의 자세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또한 (직장 내 상급자 혹은 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일상적인 갑질과 언어폭력, 인격모독 등을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찾는 것에서도 정부와 언론의 책임은 막중하다. 권력층이나 혹은 몰상식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발생되는 '갑질'을 다룰 때마다, 언론은 더욱 책임감 있고 예리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저 정보만 분석해서 나르는 역할이 아니라, 왜 지속적으로 발생되는지, 타국의 사례에서 어떠한 예방법이 있고 우리가 적용할 수 이 있는지에 대한 보다 실효성 있는 분석과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정부는 일단 법조인들을 포함한 공직자들부터 모범이 되도록 끊임없이 내부 점검을 시행해주기를 바란다. 갑질 문화가 어디서부터 왔겠는가.
10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성장, 고도성장을 해온 대한민국.세계 10위권을 안팎을 드나드는 경제대국이 되었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런데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무한경쟁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다.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하며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었지만 오만한 성취감도 동시에 쥐게 되며 '갑'질을 당연시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상대적인 '을'의 입장에 놓인 사람들은 갑질을 당하며 끝없는 무력감과 박탈감, 그리고 복수심을 갖게 만들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갑을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사회발전'이라는 용어 속에 '시민의식의 발전'이라는 말은 빠져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함에 저항하고 목소리 높이기보다는, 그저 순응하거나 '나도 빨리 올라가서 벗어나야지' 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 전체를 대함에 있어 용서와 이해, 양보하는 미덕을 다시 한번 발휘해야 할 시대다. 나 혼자 산다고 외치지만, 그 속에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상대방의 삶도 존중하며'라는 전제조건이 기본으로 깔려있어야 한다.
요새는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EBS 한국기행을 보며 잠이 든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여,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거나 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에서 자급자족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분들도 나름대로의 고충도 있으시겠지만, 산과 바다가 주는 모든 것들에 감사해하며 욕심내지 않고 서로 감싸고 보듬어주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행복의 기운이 느껴졌다.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고 내 삶이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고, 저기에도 사람이 있다. 꼴값 떠는 갑질의 시대가 아닌 서로 존중하는 '값진 '시대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