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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겨울 Jun 22. 2020

공간에 머물고 시간과 흐르는 기억.

영화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감독: 왕가위
주연: 금성무, 임청하, 왕페이, 양조위


<우리는 항상 어깨를 스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알지도 못하고 지나친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까운 친구가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름은 하지무. 경찰 넘버 223.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치던  순간 그녀와의 거리는 0.01cm. 57시간 ,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운명은 수많은 사람들과 뒤엉켜 스치는 풍경 속에 숨어 있다가 초점이 맞는 한순간 단 하나의 피사체로 나타난다. 그곳에서 발견되기만을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밤과 낮의 경계에 선 새벽처럼 섞이지 않은 두 세계의 푸른빛이 물든 1994년 홍콩의 밤,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한 남자가 뛰어나온다.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을 움켜쥐고 그를 좇고, 앞서 달리던 그는 찰나의 순간 한 여자와 부딪힌다. 짙은 어둠 속 까만 선글라스와 레인코트, 새빨간 입술에 밝은 금발의 이질적인 모습이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실연을 당할 때면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경찰 넘버 223(금성무)은 멋쩍은 표정으로 단골 패스트푸드 가게 앞 공중전화를 쥐고 있다. 정작 헤어진 여자 친구에겐 연락도 못하고 공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손에 붙든 전화기처럼 한 줌의 기대를 놓지 못하는 것은 하필 그녀가 이별을 통보한 날이 4월 1일, 만우절이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못한 이별 후의 기대 섞인 미련은 상대방이 흘린 의미 없는 낱말을 그럴싸한 문장으로 만든다.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모으며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마치 그녀가 좋아했던 통조림의 마법이 이별을 한 달 간의 거짓말로 만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마침내 5월 1일, 그의 생일이기도 한 그날까지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자 비로소 이별을 받아들인다. 유통기한을 가진 것은 이별의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이었다.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물건은 없는 것일까?> 진열대에 신선한 제품만 꺼내놓는다는 편의점 직원에게 통조림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를 거치는데 그렇게 쉽게 폐기할 수가 있냐고 막무가내로 따지고, 유통기한이 다 된 30개의 통조림을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통조림 깡통 속에 들어있는 것은 파인애플 몇 조각이 아니라 꼭꼭 씹어 삼켜야 할 미련이다. 쉽게 단념할 수 없는 것을 떨치려 할 때 필사적인 마음은 때로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애처롭다. 뒤늦게 옛 애인과 동명인 또 다른 ‘메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 하지만 그녀 역시 새로운 사람에게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메이'를 소개해준 가게 주인으로부터 언제까지고 널 기다릴 줄 알았냐는 핀잔까지 덤으로 받는다. 사람의 마음은 시간과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치던 그 순간 그녀와의 거리는 0.01cm.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223의 내레이션과 함께 페이(왕페이)가 일하는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은 시끄럽게 울려 퍼져 경찰 넘버 663(양조위)이 서있는 길까지 닿는다. 소리는 공간의 경계를 무신경하게 넘나 든다. Mamas&Papas의 California Dreamin'은 관객의 몰입을 위한 효과음이 아니라 스크린 속의 두 사람 사이를 채우며 분리된 둘의 공간을 하나로 잇는다. <그녀가 떠난 뒤로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슬퍼 보였다. 이 방 물건들을 위로한 후 잠든다.> 연료가 닳기도 전에 비행기가 돌연 항로를 바꿔 떠났다. 사랑의 끝을 유예하고 싶었던 223이 통조림으로 시간을 붙든 것처럼 663은 두 사람이 함께한 그의 공간에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663에게 있어 집은 감정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곳곳에 놓인 사물에 투영된다. 슬픔에 빠져있는 그를 대신해 수건과 방이 차례로 운다. 닳아서 줄어든 비누를 보며 왜 이렇게 말랐냐고 자신감을 북돋우려 애쓰고 젖은 수건은 축 쳐져있지 말라고 다그친다. 공감과 연민, 이해의 대상 속에는 늘 자신이 녹아있다. 스스로를 보듬는 대신 663은 물건을 집어 들고 다정하게 타이른다. 변했어. 변하지 말아야지. 그녀가 떠났어도 자신은 변하지 말아야지. <그날 오후 꿈을 꾸었다. 내가 그의 집에 있는 꿈이었다. 거기서 나오면 깨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663은 전 여자 친구가 남긴 편지를 확인하는 것을 거부하며 명료하게 과거형이 된 사랑을 직시하지 못한다. 편지와 그 속에 들어있는 열쇠를 맡아주기로 한 페이는 663의 집을 몰래 드나들기 시작한다. 날마다 조금씩, 서서히 공간을 변화시킨다. '열쇠'와 '공간'이 가진 상징은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작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와 닮아있다. 제레미(주드 로)는 “가끔은 열쇠를 간직하더라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아.”라는 전 여자 친구의 말에 “문을 열었다 해도 찾는 사람이 거기 없을 수 있지.”라고 답한다. 제레미의 꿈은 여름에 시작해 이듬해 봄에 끝났다. 그러나 끝난 줄 알았던 페이의 꿈은 다시 계속된다. 자신이 떠난 자리에 머물며 그녀를 기다리던 그와 다시 만난 순간에. 223의 삐삐 암호는 ‘널 영원히 사랑해’이고, 사랑을 유통기한 같은 건 없는 통조림에 담아 만년까지 간직하길 원한다. 자신의 공간에 갇혀있던 663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사랑을 원하는 시간만큼 원하는 공간에 묶어둘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기억은 변한다. 기억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시간과 함께 흐른다. 사랑을 온전히 지킬 수도, 완전히 지울 수도 없지만 감정은 변할 수 있다. 그건 이별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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