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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겨울 Sep 11. 2019

불완전한 꿈에 완전하게 다가서는 법.

영화 <프란시스 하(Frances Ha)>

프란시스 하(Frances Ha)
감독: 노아 바움백 
주연: 그레타 거윅, 미키 섬너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을 원하는 동시에 세상의 틀에 꼭 맞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모순되는 바람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 ‘꿈’의 사전적 의미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자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은 헛된 기대’다. 그러니까 꿈은 애초에 이뤄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무모한 희망을 단념하고 헛된 기대를 경계하는 ‘현실적’이라는 족쇄는 어쨌든 세상 속에서 자발적으로 붙드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는 선택의 기준을 현재가 아닌 미래에 놓고 덜 후회할 것 같은 선택지를 골라내려 고심한다. 그러나 현재의 감정도 확신하기 어려운데 미래의 후회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고르지 않은 모든 선택지들은 늘 가능성으로 남아 후회의 여지를 남긴다. 체념과 타협도 분명 현명한 선택일 수 있고 필요한 때가 있다는 걸 아는데 마음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언젠가는 후회보다 만족이 더 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공원과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뛰어다니는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의 모습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여러 종류의 문제에 붙들려 있다. 변함없이 늘 함께라 생각했던 친구와의 갈등, 이상과는 다른 연애, 불안정한 수입, 어중간한 재능으로 완전히 놓지도 붙들지도 못하는 꿈, ‘가난한 예술가’라는 낭만 섞인 수식어를 달기에는 ‘예술’로도 ‘가난’으로도 부족한 어떤 상태. 잘 될 수 있을 거라 내뱉는 자신과 달리 그 속에 싹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웃고 떠드는데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사람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러운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우린 그걸 느낄 능력이 없다잖아요.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인생에서도 그렇고, 사랑에서도 그렇고요.>
‘우리만 아는 세계’, 보편적인 세상의 기준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떠나 나만이 느끼는 내 삶의 감각.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무언가에서라도 얻는 확신이나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간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정말 가끔은 ‘이만하면 괜찮은’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기차의 수많은 경유역처럼 짧게 머물 뿐이고 다시 목적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기나긴 시간이 이어진다. 지금 향하는 방향이 맞는 건지 내려야 할 역을 이미 지나친 건 아닌지에 대한 무수한 걱정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워요.
-복잡한 직업을 갖고 있어서요?
-진짜로  일을 하고 있진 않거든요.
꿈이라는 건 나와 세상에 대해 갖는 일종의 기대고, 기대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과 현재에 대한 비관이 섞여있다. 그래서 어쩔 때는 꿈이 현재를 사랑하지 않을 핑계가 된다. 분명 세상에서 묘사하는 꿈이나 그런 꿈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늘 반짝였는데 가까워지기 어려운 거대한 환상은 삶을 더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다(아니면 그 반짝임을 동경해 꿈꾸는 흉내만 내서 그런 걸까?). 무용단의 사무직 자리를 제안받은 프란시스는 다른 컴퍼니와 계약할 수 있을 거라는 말로 거절하지만 결국 하게 된 건 졸업한 대학의 기숙사 조교 일이다. 일을 하면서도 한 발은 뒤로 빼놓고 오래 머물 곳은 아니라는 마음으로 선을 긋지만 참관하려 했던 무용 수업에서는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자신이 있는 곳과 있고 싶은 곳의 괴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책임 앞에서 마냥 어정쩡한 태도를 지속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점차 실감해간다.

<프란시스 하(Frances Ha)>라는 제목의 의미는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 알 수 있다. 프란시스는 처음에 거절했던 사무직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집을 얻게 된다. 우편함에 풀네임인 ‘Frances halladay’을 써넣지만 공간이 충분하지 않자 망설임 없이 종이를 접어 넣게 되고 ‘Frances Ha’라는 글자가 남는다. 살아가다 보면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자르듯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고 다듬는 과정으로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추길 원하지만 어쩐지 점점 더 초라하고 볼품없어지는 것만 같다. 어중간하게 잘린 이름의 철자처럼. 원래의 내 모습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내가 누군지 제대로 설명도 못하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퍼지기도 한다. 예전에 영화를 봤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는 프란시스가 이름의 나머지 부분을 찢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접혀있었고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이 더 좋았다. 반으로 접혀 가려져있더라도 나머지 글자가 여전히 남아있듯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습이나 감정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언가 떨어져 나가고 변해가는 모습은 망가진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낯설게 완성된 모습인 것이다. 앞만 보다 보면 옆이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이지 않는다. 뭔가를 얻을 때 놓치는 것들, 놓치고 나서 얻는 것들이 가진 절대적 가치는 꽤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좁은 틀 안에 들어가서 예상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서있는 것만이 꿈의 성취는 아니다. 여전히 많은 곳이 비어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프란시스가 계속해서 잘 채워나가길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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