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Attila Marcel)
감독: 실뱅 쇼메
주연: 귀염 고익스, 앤 르 니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가장 실질적인 위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똑같은 약이 모든 상처에 동일한 효능을 보이진 않듯이 시간 속에만 방치된 상처는 오히려 곪거나 썩기도 한다. 시간은 상처를 지울 수 없다. 다만 아무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상처를 덮어두고 모른척한다고 해서 고통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픔을 제대로 느끼고 마주해야 한다.
창밖으로 드는 아침 햇살에 폴(귀염 고익스)은 눈을 감고 볕을 만끽하려 한다. 하지만 이모들에 의해 열린 피아노 뚜껑이 순식간에 창문을 가려 그늘을 만든다. 잠시 멈칫하던 폴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어둠 속에서 연주를 시작한다. 폴에게 있어 애니(베르나데트 라퐁), 안나(헬렌 벤상) 두 이모의 존재는 보호막이자 가림막이다. 각별한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햇빛과 빗물이 닿지 못한 채 폴의 마음은 성장이 멈춰 있다. 감정의 도구인 말은 물론 표정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때조차 폴의 얼굴은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
<애들을 속이는 사람은 싫어. 어른이야 괜찮지만 애들은 병이 나거든. 부모의 죽음을 본 걸 죄다 잊었다고? 나는 그런 얘기 안 믿어. 죽음이 그 애를 못살게 하는 게 아니야. 쳇바퀴 도는 삶이 문제지. 당신 레코드판처럼.>
기억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후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을 통해 저장된 기록의 씨앗이다. 이미지화할 수 없다고 해서 잊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생명력을 갖고서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속 어딘가에 남아 뿌리를 내리고 자라거나 시든다. 일단 씨앗이 싹트고 나면 원하는 부분만을 간직하거나 도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기억은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의 시간을 양분으로 삼아 계속해서 자란다. 알 수 없는 사이에 마음의 틈을 비집고 자라 현재를 바꿔 놓기도 한다. 특히 상처에 대한 기억은 가지 많은 식물처럼 자라서 마음 곳곳에 그늘을 만든다.
스스로의 상처에 매몰되면 타인의 상처는 물론 타인의 존재조차 보기 어렵다. 언젠가 아문다 해도 깊은 상처는 짙은 흉터로 남아 불시의 순간마다 아픔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또한 흉터에는 다른 상처를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이 내재되어 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폴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지만 여러 개의 흉터를 가진 프루스트(앤 르 니)는 한눈에 폴이 앓고 있는 아픔을 알아본다. 비밀스러운 텃밭으로 폴을 초대하고 공원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화목하지 않았던 자신의 가정과 잘 웃지 않는 남동생을 웃기기 위해 습관이 된 농담, 그러다 모든 상황에 지쳐 돌연 인도로 떠나게 된 과거를 덤덤히 늘어놓는다. 폴은 프루스트의 도움으로 기억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행복과 슬픔을 건져내고 감정을 끌어안는 방식을 터득해간다.
폴은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며 마침내 양극단에 놓인 두 가지 진실을 마주한다. 한쪽에는 자신의 왜곡된 기억과는 달리 부모가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고, 또 폭력적인 모습으로만 각인된 아버지도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을 알려주는 따뜻한 진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매일같이 연주해온 피아노가 사랑하는 부모랑 죽게 했다는 차가운 진실이 있다. 폴은 충격으로 스스로의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심듯 피아노 안을 형형색색의 꽃으로 채우고 물을 뿌린다. 더 이상 트라우마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폴의 모습이 낭만적으로 그려지지만 폴을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이제껏 진실을 감춰온 두 이모의 책임은 너무 가볍고 쉽게 지워져 있다. 애초에 폴이 피아니스트가 된 건 자신의 의지도, 심지어는 부모의 바람도 아니었다. 폴이 모든 걸 알게 된 순간조차 두 이모는 마르셀의 친구가 저지른 불법 개조만을 거론할 뿐이다. 다소 과하게만 보였던 조카를 향한 두 사람의 애정은 프루스트라는 공격의 대상 앞에서 강한 소유욕과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 애는 우리 거야! 누구도 못 뺏아가! 그러나 정작 프루스트가 폴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Vis ta vie.(네 인생을 살아.)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좋든 나쁘든 기억은 힘을 갖고 있다. 절망을 지날 때 반대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시간을 견디는 힘이 되어준다. 물론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기억을 생생하게 꺼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행복을 기록한 사진이나 글을 꺼내 볼 수는 있다. 그런 기억으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수도꼭지를 채우고 각자의 고된 시간을 지나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씁쓸한 허브티와 달콤한 마들렌, 추억이 깃든 음악으로 과거를 재생하는 프루스트의 환상처럼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특정한 음악이 과거의 기억이나 기분을 떠올리게 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가 가진 특별한 능력은 타인의 아픔, 그 당사자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는 데 있다. 프루스트는 외면할 수도 있었던 폴의 상처를 내버려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픔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네준다. 스스로가 방치한 어떤 상처들은 그렇게 타인을 통해서만 발견되고 치유될 수 있다.
폴은 공원의 병든 나무를 지키는 시위를 하던 도중 망가진 프루스트의 우쿨렐레를 정성스레 고친다. ‘일시 고장’ 난 프루스트의 묘비 앞은 꽃과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으로 가득하다. 우쿨렐레를 내려놓고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우쿨렐레의 현을 두드린다. 폴은 그 소리에서 프루스트가 건넨 메시지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겉옷 속에 우쿨렐레를 챙겨 든다. 그리고는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향해 프루스트가 좋아했던 바로 그 미소로 화답한다. 내리는 비와 햇살은 어떤 가림막도 없이 온전히 폴에게 쏟아진다. 슬픔을 제대로 슬퍼한 뒤 기쁨을 알게 된 폴은 피아노를 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우쿨렐레를 연주한다.
기억은 기억으로 상쇄되지 않는다. 아무리 커다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또한 기억은 복합적이고 가변적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기억의 불순물이 아니다.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은 긴밀하게 이어져 서로를 보완하며 감정의 일부를 떼어내면 전체 감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종종 나이를 먹는다는 건 참아야 하는 것과 견뎌야 하는 것, 그러다가 무뎌지는 것들의 목록을 채워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감정은 소모되고 닳아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을 때 녹슬고 망가지기 쉽다. 날카롭게 깨져있는 많은 기억의 조각들은 어쩌면 싫은 기억을 도려내려 애쓴 노력이 만든 파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