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L’avenir, Things to Come)>
다가오는 것들(L’avenir, Things to Come)
감독: 미아 한센-러브
주연: 이자벨 위페르, 에디뜨 스꼽, 로만 코린카, 앙드레 마르콩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지속되거나 반복되다 보면 도리어 초연해지는 순간이 온다. 마치 극적인 연출을 위해 비극적인 상황을 짜깁기한 드라마 같은 걸 보는 기분이 되어서. 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극 이후에 슬픔을 상쇄할만한 ‘보상’조차 주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슬픔이 지나가면, 혹은 하나의 슬픔이 지나기도 전에 다른 슬픔이 다가온다. 뻥 뚫린 마음이 메워지기도 전에 자꾸만 새로운 구멍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기나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건 경험이 남긴 약간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짙은 슬픔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시간을 덧칠하다 보면 옅어지는 때가 온다는 걸 안다. 슬픔이 뚫고 지나간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지만 타인의 마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슬픔에 쓸모를 덧붙이는 게 그저 합리화라 해도 그런 믿음은 슬픔을 지날 수 있는 위안이 된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홀로 앉아 주관식 시험지를 채점하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가 부르는 소리에 갑판으로 나간다. 이내 바다를 가로질러 샤토브리앙의 무덤에 도착한다. 다른 가족들이 떠난 가운데 하인츠는 그 풍경 앞에 잠시 홀로 머문다. 막힘없이 뚫린 수평선으로 밀물이 밀려오고 <L’avenir> ‘미래’라는 뜻의 불어와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른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간을 지칭하고 있지만 어감은 꽤나 다르다. 막연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미래’와 달리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말에는 속도감이 있다. 다만 어떤 미래가 서서히 다가오는가 하면, 어떤 미래는 갑작스레 불쑥 나타난다.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온전한 자유’와 사랑은 양립할 수 있을까. 사랑은 복합적인 감정이다. 이상과는 다르게 그 안엔 긍정만큼이나 많은 부정의 단어가 뒤섞여있다. 지나치게 가까워서 상처를 주고 원하는 만큼 가깝지 못해서 상처를 받는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 얽매임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차라리 무너지고 싶은 순간에는 어떻게든 버틸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러 종류의 이별을 겪고 자유를 말하는 나탈리의 표정에는 홀가분함과 허탈함이 모두 담겨있다. 이별은 관계의 마침표가 될 수 없다. 과거를 온전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별은 이전에 쓰인 기록을 가위로 자르고 뒤죽박죽 뒤섞어 놓는다. 이별은 매년 휴가 때마다 가족들이 시간을 보냈던 브르타뉴의 별장을 가지 못한다는 것이고 긴 시간 동안 애정을 들인 정원을 더 이상 가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추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곳에 새로운 추억을 덧씌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이 진정한 선을, 그것을 온전히 따르길 바란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담담히 <팡세>의 문장을 읽는 나탈리의 모습은 스치는 차창 밖 풍경으로 이어진다. 어떤 슬픔은 잠복기를 갖다가 면역력이 떨어진 순간 단숨에 마음을 집어삼킨다. 창밖을 보며 눈물을 쏟아내는 나탈리의 모습을 건너편에 앉은 소녀는 의아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때 나탈리는 다정하게 길을 걷는 남편과 외도 상대를 목격한다. 감정을 추스르고 출판사와 미팅을 갖지만 매출이 적다는 이유로 진행되려 했던 책의 개정마저 무효화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돌아온 집에는 그새 남편이 챙겨간 책들이 빠져 휑해진 책장만이 남아있다. 자신의 메모가 담긴 <레비나스>까지 없어진 것을 보고 황당해한다.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탈리는 새로 구매한 <레비나스>를 펼친다. 그리고 어머니의 요양 생활과 죽음으로 얼떨결에 떠맡게 된 고양이 판도라와 함께 제자 파비앙(로만 코린카)과 동료들이 머무는 공동 거주공간에 찾아간다. 숲 속으로 사라진 판도라를 두고 파비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나탈리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본능 같은 건 진작에 잃어버려서 버티지 못할 거라며 애타게 찾는다. 다음 날 아침, 나탈리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늙고 뚱뚱해서 데려갈 사람도 없는’ 판도라는 쥐 한 마리를 물고 나타난다. 나탈리는 알레르기도 잊은 듯이 판도라를 꼭 끌어안는다. 마치 세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대가 닳아서 사라졌을 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건네받은 것처럼.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자꾸 오답만 골라서 사는 기분일 때 인생에는 이미 정해진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정해진 만큼의 오류를 거듭한 뒤 정답을 깨닫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지겨운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답을 빌려 거창하게 채워도 체득의 과정이 없는 답은 결코 정답이 되지 못한다. 정답의 많은 지분을 후회가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고치고 고심해서 남긴 정답조차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오답이 되는 걸 보면 애초에 정답 같은 건 없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답을 찾는 이유는 덜 후회하고 덜 방황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그저 낭비되는 시간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지겨운 시간을 건너뛰려 조바심을 낸다. 나탈리가 수업에서 언급한 루소의 <신 엘로이즈> 문장처럼 모두가 그토록 도달하려 애쓰는 저마다의 목적지는 환상만큼 근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의 여지가 주는 만족이 실제보다 크다해도 사람들은 상상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견디며 나아간다. 나탈리는 슬픔에서 빠져나오려 아등바등하지도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다가오는 슬픔을 마주하며 초연했다가도 무너지고, 무너졌다가도 스스로를 다독이고 다시 덤덤히 지난다. 무수한 망설임과 슬픔 속에서 가늘지만 단단한 나탈리의 태도와 문장들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