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1991년, 내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정 피고인으로 서게 되었을 때 쓴 '항소이유서'이다. 노태우 정권 당시, 난 운동권 출신은 아니었지만, 광주 518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부활의 노래>로 감독 데뷔를 했다. 당시 뜻있는 사람들이 국민주 모금형식으로 최소한의 돈을 모아 힘들게 촬영했다. 그런데 5.18영화로는 최초로 상업영화극장의 개봉을 앞두고, 연세대에서 시사회(1990.8월)를 했는데, 공연윤리위원회에 '심의전 시사회'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당시 첫 심의에서 영화의 4/1정도가 잘렸을 정도로 가혹한 검열을 당했다. 난 영화사 식구들과 당시 국회의원분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야당 의원들의 항의덕분에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재심을 받았다. 결국 재심에서 중요장면 5분 가량 잘린채 1991년 3월1일 중앙극장에서 정식 개봉을 했다. 개봉날 당시 평민당 총재셨던 김대중 전대통령님이 오셔셔 영화를 보신후, 금일봉 100만원을 주시고, 스텝.배우들에게 점심도 사주신 뒤 명동성당앞에서 기념촬영도 함께 해주셨다. 너무 영광스럽고 감사했던 추억이다.
하지만 검열로 삭제당한 영화는 흥행에 성공 못했고, 감독이자 대표인 나는 영화법위반으로 법원에 불려다녀야 했다. (촬영할때만 해도 대표는 다른 후배가 맡았는데, 심의를 앞두고는, 나중에 탄압받을지 몰라, 문제 생기면 모든 걸 책임지고자 감독인 내가 법적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약식 벌금 100만원이 나왔는데, 나는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고, 돈이 없어 변호사를 선임 못한채, 내가 판사앞에서 스스로 변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50만원 벌금으로 판결났지만, 그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다시 항소하고자, '항소이유서'를 써서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너무 힘들어, 김대중 전대통령께서 주신 금일봉의 일부로, 그냥 50만원 벌금을 내고 마무리하고 말았다.
영화 개봉 직후, 난 내 인생 최악의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35세.. 그야말로 빈털털이 신세였다. 집이 없어 좁은 영화사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던 나는, 다행히 광명시에 사는 한 후배(양태화)가 연립주택의 안쓰는 반지하방 하나를 공짜로 내줘 거기서 1년 6개월 정도 기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준비한 두번째 영화 <두여자 이야기>(1994, 대종상 작품상, 신인감독상등 수상)로 운좋게 영화판에서 살아남았다. <부활의 노래>는 1994년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잘렸던 장면을 복원해 공윤 재심의에서 무수정통과되었고, 덕분에 나는 그 영화로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그때는 38세, 서울 황학동 1평 반짜리의 좁은 자취방으로 이사해 살 때인데, 주인아줌마가 TV에서 상을 받는 나를 보고 깜짝놀랐댄다. 웬 불쌍한 백수 노총각인 줄 알았는데, 영화감독인 걸 그때 안 것이다.^^ <부활의 노래>는 1994년 당시 '청소년관람불가'였지만, 202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리마스터링을 해줘서 당시 어색한 장면들을 재편집을 한 뒤, 영상물등급위(전.공윤)에 다시 심의를 넣었는데, '12세관람가'를 받았다. 내용은 같은데, 시대상황에 따라 전혀 달리 평가받은 셈이다. #아래 내용은 바로 그 당시 내가 썼던 '항소이유서' 원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항소이유서
사건 : 91노 2684 영화법 피고인 : 이정국
재판장님!
본인은 영화감독 겸 독립프러덕션 대표로서 1990년 8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부활의 노래」를 제작했다가 심의전 상영을 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1991년 3월 29일 정식재판을 통해 50만원 벌금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발되고 벌금형을 받게 된 것은 단순히 죄를 저질렀기 때문보다는 그동안 금기소재였던 ‘광주’를 다룬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되기에 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고발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영화계에서 ‘심의전 시사회’를 이유로 법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전혀 없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의 노래」가 반체제적이거나 불순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작품이 91년 3월 서울, 광주, 부산 등에서 일반공개되어 아무 문제 없이 상영된 것만 봐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노래>의 한 장면
저의 작품이 고발된 법적 근거는 영화법 12조에 ‘심의전에 상영할 수 없다’는 조항입니다. 그동안 영화계에서는 법에 명시된 그 상영은 극장에서 상행위로서 이뤄지는 상영을 의미한 걸로 인식했지 시사회는 별개로 여겨왔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영화치고 심의하기 전에 영사기에 필름을 걸고 시사 형식으로 상영해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화면 상태를 인지하고 편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의 영화에 적용하듯이 법을 그대로 해석해서 걸고 넘어진다면 지금까지 상영된 모든 영화, 그리고 상영 중인 모든 영화, 또한 앞으로 완성될 모든 영화가 ‘심의전 상영’을 이유로 고발되어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비록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엄격히 ‘상영’과 ‘시사회’가 구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시사회’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시사회조차 처벌한다는 것은 영화예술 자체를 근원적으로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10년 가까이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또는 감독지망생으로서 수많은 영화 시사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중에는 심의 전의 시사회도 있었고 심의 이후의 시사회도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 일반인 자격으로 참여했으니 그 시사회는 공개시사회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사에서는 최종 편집을 위해 심의 넣기 전에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시사회를 하는 게 관례화되어있고, 그렇다고 법적인 하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활의 노래」는 이상하게도 기존의 한국 영화와 다를 바가 없는데도 공개시사회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저는 전혀 법적으로 시사회를 처벌한다는 규정을 보지 못했고 과거에 처벌받은 적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시사회를 했습니다. 세방현상소와 연세대 강당에서 이뤄진 시사회가 그 주요 근거였습니다만 사실상 현상소에서 프린트를 내서 그 필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사회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심의 넣기 전에 최종편집을 할 수 있고 색보정 및 사운드 상태 확인을 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연세대에서 가진 시사회 역시 우리 영화의 회원들(3백명 가량 됨)들과 우리 영화에 무료로 참여한 엑스트라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사람들에게 보여준 시사회의 평을 통해 재편집할 수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상행위를 위한 상영이 아닌 작품 최종완성을 위한 시사회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입장료를 전혀 받지도 않았고 팜프렛조차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상영’이 아닌 ‘시사회’이기 때문이죠.
공연윤리위원회 측에선 비록 시사회일지라도 공개 시사회였기에 고발조치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발되기 얼마 전에도 제 자신이 일반인으로서 심의 전의 영화 시사회 즉 공개시사회를 본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0년 여름에 개봉된 「베어」, 89년에 개봉된 「구로 아리랑」 등은 정확하게 기억한 영화들입니다. 대부분 심의전 공개시사회였죠. 특히 「엘비라마디간」 같은 영화는 90년 7월 말 해변에서 공개시사회를 한 후 8월 중순에야 심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실례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걸 확인하고자 하신다면 그동안 상영된 모든 영화들의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 비치된 시사회 일정과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완료일자를 비교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제재를 안 받았던 것은 시사회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된다면 공윤(공연윤리위원회)에서 가만두지 않았겠죠. 직무유기일 테니까요.
그러므로 제가 「부활의 노래」시사회로 인해 고발된 것은 부당하고, 무죄입니다. 만약에 제가 유죄라면 그동안 만들어진 대부분의 한국영화 역시 모두 유죄로서 처벌받아야 하고 공윤 역시 직무유기로서 처벌 받아야 합니다. 또한 ‘심의전 상영 불가’라는 영화법을 직역해서 저희들을 처벌하게 된다면 그동안 만들어진 모든 영화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똑같이 처벌하셔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했듯이 어떤 영화건 영화 특성상 심의전에 상영을 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불법입니다.
저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재판장님께서도 그런 불행을 원하지 않겠지요. 사실 영화, 창조적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위해 첫걸음을 내딛는 젊은 영화감독으로서 하나의 작품을 검열이라는 과정(헌법에 창작,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는데도)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고통인데 단지 시사회를 이유로 고발되는 이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특히 모든 걸 합법적인 공간 내에서 성실하게 활동하고자 했던 저희에게 이번 고발 사건과 1심 판결의 유죄선고는 슬픔을 주고 있습니다. 공윤은 왜 막 피어나는 새싹을 밟으려 할까요? 그동안 죄가 되지 않았던 일로 빌미삼아 억지로 죄를 만들려 할까요? 어렵게 없는 돈을 모아 고생 끝에 제작한 영화를 방해하려 할까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공윤은 오히려 젊은 영화인들을 위해 오히려 도와주고 용기를 주어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직도 공윤이 저를 영화감독이 아닌 범죄자로 규정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90년 8월 저희를 고발한 이후 「부활의 노래」는 모든 합법적인 심의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극장상영(중앙극장)을 모두 끝냈습니다. 고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광주’라는 소재로 인해 벌어진 불상사나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국영화의 입장에서 (이건 공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의 영화 유죄선고는 커다란 불행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한국영화인이 동시에 유죄선고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윤은 영화가 완성된 즉시 기술시사회(이것도 원리원칙대로 하면 상영행위가 되기 때문에)도 못하게 하고 직접 심의를 먼저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영화라는 게 성립이 안 되겠죠. 다행히도 저는 그런 엄청난 불행은 오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저는 무죄이니까요. 그동안 7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과거 영화 선배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저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 작업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짓기 위해 영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저의 범죄 기록은 저에게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될 것입니다. 저는 대학 연극영화과 시절, 단편영화를 만들어 각종 영화제에서 8개의 상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 중에서 영화진흥공사라는 관의 단체에서 받은 상이 3개나 되고, 어떤 작품은 권위있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저는 고생 끝에 「부활의 노래」로 감독 데뷔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입니가? ‘영화법 위반!’ 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아니 아직 결판이 안 났으니 확정범은 아니겠죠. 그렇지만 순수하게 영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공윤에 대해 너무도 당혹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공윤이 그런 곳일까요? 그렇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순간적인 착오라고 믿고 싶습니다.
비록 액수가 많지 않은 벌금형이지만 (그러나 50만원도 가난한 영화인의 입장에서 보면 거금이라고 한다면 믿지 않으시겠죠?) 저는 모든 게 부당하고 잘못된 고발이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장황한 항소이유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위축되고 궁지에 몰리고 있는 한국영화 입장에 서서 현실적인 법률 적용을 통해 정당한 판단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1991년 5월 20일 이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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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항소이유서 원본을 최근에 과거의 자료를 정리하다 발견하고, 아들에게 초록을 부탁해 이 브런치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당시 본인 열정과 돈까지 투자하며 참여한 배우들과 스텝들, 그리고 이름도 모르지만 도움을 주신 수많은 분들을 초대해 상영회를 갖고싶다. 새삼 그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