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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미 May 08. 2024

로또 1등에 숨겨진 또 다른 가치

당첨 번호 공개 전, 일주일 동안의 상상들

좋은 꿈을 꿨다. 로또를 하는 꿈이었고, 번호까지 언뜻언뜻 보였다. '아, 이건 예지몽이다. 로또를 사라는 조상님의 계시다.' 로또 1등에 당첨될 징조라고 믿었다. 한순간에 몇십 억이 통장에 꽂힌다라...


로또를 살 때는 3등도 2등도 아닌 무조건 1등이 당첨되리라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항상 1등에 당첨될 가능성을 90% 이상으로 두면서, 한편으로는 실망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당첨 확률 0%도 좁쌀만 하게 염두에 둔다.


로또 1등에 당첨돼서 통장에 몇십 억의 돈이 들어온다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1억은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리고, 좋은 차와 집도 사드린다. 동생 부부에게는 몰래 계좌에 1억을 붙여준다. 어릴 때 용돈을 챙겨주셨던 친척분들에게는 당첨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5천만 원씩 입금해 드린다. 남은 돈으로는 현재 정말로 필요한 부분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은행 여러 군데에 저축한다. (혹시나 은행이 망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이렇게 로또 1등 당첨 후의 계획을 세우며 일주일을 보낸다. 그동안 계획은 여러 번 수정된다. 부모님께 드릴 돈은 아버지, 어머니 따로 1억씩 드리자. 동생 부부에게는 조금 더 줘야 할 거 같다. 중요한 순간에 내가 금전적으로 어려워 마음처럼 못 해준 게 한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돈으로는 건물을 사서 임대료를 받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 주기적으로 돈이 나오는 상황을 만들어보자는 심산이다. 그렇게 한 달에 8백만 원 정도가 통장에 꽂힌다면 저축한 돈을 갉아먹지 않으면서 돈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하고 살 수 있다. 공기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사는 것도 후보에 둔다.


상상만 해도 설렌다. 어쨌든 상상은 해볼 수 있지 않은가. 토요일 오후 당첨 번호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토요일 오후, 당첨 번호가 공개되고 결국 터무니없게 빗나간 숫자들로 인해 로또는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로 변한다. 개꿈도 가지가지라고 생각한다. 조상의 도움도, 사후 세계도 없다. 또한 내가 쌓아온 덕도 별수 없구나 싶다.


허망하게 주말을 보내다가 가만히 누워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하고 싶었던 계획들을 돌아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남짓 당첨금 분배 계획을 짜면서 떠올린 생각들은 로또 1등 당첨금만큼 큰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과 미안함을 되새기게 됐다. 나의 믿음과 인식과 감정의 허용 범위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깜냥도 적잖이 드러났다.


1등에 당첨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불운한 인생을 비관하기보다는 로또 한 장을 품에 지니며 일주일동안 이러저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수많은 가치의 진위여부를 가려냈음에 큰 의미를 둔다. 바쁜 일상 속에서 틈틈이 인생 정리를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가치 있다고 느껴진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과하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물론 로또 1등 당첨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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