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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20. 2023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의 힘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고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참 귀한일이다. 사랑이 근간인 부모-자녀 간에도 자녀를 존재로서 온전히 사랑하는 부모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속의 사랑 주머니가 암만해도 채워지지 않은 자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 결핍을 드러내기 마련일 것이다. 때로는 그 결핍이 끝 모를 허기로 나타나는지 먹는 것에 유독 집착하는 한 아이를 본 적도 있다.


나도 부모의 따뜻한 사랑에 꽤나 목말랐던 것 같다. 부모님은 바쁜 와중에 온 힘을 다해 길러 주셨겠지만, 가부장적이고 남아 선호 사상이 짙은 집안에서 큰 딸로 태어난 나에게 사랑의 체감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지받지 못해 외로웠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본능적으로 억울해 분노를 표출하던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원망과 분노 표출도 한 때였지 싶다. 이젠 맞서며 겪는 격정적 감정의 소용돌이를 버텨 낼 에너지가 사그라들었고,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자꾸 되돌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미 벌어진 일, 뭘 해도 바뀌지 않는 일,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다. 딱 그만큼이 내게 허용된 몫의 사랑이었다고, 더 바라면 욕심이라고 주문을 외운다. 체념의 마음일까?


최은영 작가의 책 <밝은 밤>은 가족 간에 제대로 이해받고 사랑받지 못해 생긴 이런 상처들을 다룬다. 책의 곳곳에서 내가 겪었던 듯한 비슷한 상황과 감정들을 발견하며 금세 공감했고 몰입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지하며 자신이 처한 굴레를 헤쳐나가는, 용기 있는 인물들이 전하는 위로가 어느새 와 닿았다.


책 속의 지연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으로 대처하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언니의 죽음 이래로 부쩍 냉담해진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착해야만 했고,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계를 넘어 도전해 학위를 받았다. 결혼 후 남편에게 상처받으면서도, 늘 괜찮은 척, 별 일 아닌 척해야 했다.


하지만 바람까지 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어 결국 이혼을 감행하며 엄마를 실망시킨 대가는 컸다. 엄마는 지연의 고통을 외면했고, 아버지와 더불어 사위의 안위를 더 걱정했다. 남편이든, 엄마든 세상의 한 명쯤은 내 편이겠거니 믿었던 지연의 희망은 깡그리 무너지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지연이 얼마나 홀로 외롭고 힘들었을지 충분히 헤아려졌다. 지연의 엄마와 남편처럼, 사랑한다면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할 줄 모르는 태도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이 다시금 일깨워준다.


사랑하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으려는 희망을 포기하고 체념한 지연은 새로 이사간 도시에서 오랜 기간 왕래가 끊겼던 할머니를 만난다. 그리고 할머니가 우연히 전해주는 증조모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할머니와 교감을 넓혀가고 정서적으로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의 과거이야기를 들으며 지연은 시대가 다르고 속박되는 굴레는 달라도 존재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고, 사랑받지 못해 아픈 것이 자신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가 준 위로의 힘으로, 지연은 자신의 진짜 존재를 잃고 살았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고 엄마와도 그간 너무 아파서 고이고이 묻어두었던 진실을 펼쳐놓을 힘이 생긴다.


톨스토이는 진즉에 그의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인간은 무릇 사랑으로 사는 존재임을 밝혔다. 유약한 인간에게 사랑이야말로 험하고 거친 세파 속에서 따뜻함을 잃지 않고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뜻이리라. 난 아무래도 그 사랑을 아이들을 출산하고 양육하며 체험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경이로워 조건 없는 사랑을 한없이 베풀었고, 나 또한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한없이 되받았다. 그 사랑의 힘으로 다행히 그간 쌓였던 외로움도, 분노도 더러는 삭여낸 것 같다.


마음에 남는 책 속의 장면이 있다. 증조부가 죽고 나서 회령을 방문한 새비네가 증조모와 함께 젊은 할머니와 어린 엄마를 데리고 회령 바닷가에서 눈이 부시게 자유를 만끽하며 뛰어노는 장면이다.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어떤 구속도 없이 마음껏 행복한 그 장면이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희망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작가는 제목을 <밝은 밤>이라고 했을까? 밤은 어둡기 마련이지만, 밝음이 깃든 어둠처럼 어둠속에 있으나 어둡지만은 않은, 손에 쥘 희망은 아직 조금은 남아있지 않겠냐는 의미를 담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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