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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Aug 24. 2023

귀감이 되는 부부, 알게되어 든든합니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손이 느린 편인 나는 초보 주부일 때 밥 하기가 가장 고역이었다. 두부조림이나 콩나물무침 같은 간단한 반찬을 만들 때에도 씻고, 자르고, 데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 모습이야 뿌듯했지만 눈 깜짝할 새 바닥나는 음식들을 보며 다음 끼니는 또 얼마나 오래 고생해야 하나 속으로 한숨짓곤 했다. 덜 힘들고 싶어 음식을 쉽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언제든 귀를 쫑긋 기울였다.


그렇게 각종 요리법을 뒤지던 중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란 책을 만났다. '요리가 없는 요리책',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도 훌륭한 끼니가 될 수 있다는 책 소개 문구에 눈이 번쩍 띄었다. 시골에서 남편과 먹을거리를 직접 키우면서 틈틈이 책 읽고 글 쓰며 생활한다는 저자의 생활양식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책에는 주로 수프와 샐러드, 디저트 요리들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막상 써먹고 싶은 요리는 별로 없어 아쉬웠다.


대신 중요한 걸 하나 배웠는데 바로 소박한 음식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었다. 채식을 하는 그는 음식이란 소박할수록, 날것일수록, 섞지 않을수록 좋다고 했다. 조리와 준비가 간단하고, 소화는 쉬우면서도 영양가가 더 높고 건강에 이롭다며 말이다. 소박한 끼니가 건강과 환경을 돕는다는 저자의 의견에 공감되었다. 덕분에 이후로는 정성과 맛에 덜 연연하며 단순한 요리법을 자주 시도했던 것 같다.


간단한 조리법의 이점을 일깨워 준 헬렌 니어링을 잊지 않고 있던 터에 최근 그의 에세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발견하고는 오랜 친구와 재회한 듯 반가웠다. 이 책은 헬렌이 그의 나이 87세 때, 남편과 함께한 53년의 삶을 회고하며 쓴 에세이다. 요리책에서는 다 드러나지 않아 궁금했던 그와 남편의 살아온 궤적을 자세히 엿볼 수 있었다.


에세이로 접한 헬렌 니어링의 진짜 모습은 요리책을 통해 짐작했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한가로이 목가적 생활을 영위하는 여성이리라 예상했건만, 실제 그의 삶은 파격과 치열에 가까워 놀라웠다. 24세 때 결혼의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21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스코트 니어링을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한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기회였던 네덜란드 귀족 청년의 청혼도 거절하며 말이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도의 길도, 귀족의 청혼도, 부모의 반대까지 모두 무릅쓰고 스코트를 선택한 이 결정은 당시 1920 ~ 1930년대의 인습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뉴욕의 제지공장, 사탕포장 공장등에서 일한 적도 있다 하니, 그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헬렌은 이런 남다른 결정이 부모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부모는 미국 뉴저지 릿지우드의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마을사업에 관심이 높고 각종 사회봉사 및 지역 교육단체 활동은 물론 동물학대방지협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부모 덕분에 헬렌 또한 어려서부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에 관심이 높았고, 이런 성향이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스코트의 가치관과 잘 맞았던 듯하다.


스코트 니어링의 삶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류층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빈부격차에서 오는 불평등에 관심이 많았다. 왕성한 저술과 강연활동으로 한 때 신망받던 경제학 교수였지만, 헬렌을 만날 당시에는 인생의 밑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상황이었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반전 운동을 벌인 일로 해직당하고 가족에게도 버려진 채 당시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점은 그런 위기상황에서 스코트 니어링이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생의 본질은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가진 생각과 행위에 달려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더욱 선명하게 다듬었다. 스스로 세운 삶의 구체적 원칙들에 따라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을 다니고 노동과 저술을 하며 치열하게 실천해 내었다.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에서 일신의 영달이 아닌, 자신이 믿는 가치를 과감히 밀고 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적 배척에도 신념대로 우직하게 살아내는 스코트와 그의 신념을 공감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조력자 헬렌. 책을 쓴 헬렌에 따르면 그 둘은 독립적이면서도 일체감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면서 53년을 해로한 이상적인 부부였다고 자부한다.


운명적으로 결합한 두 사람이지만, 생계를 유지하지 못해 1932년 뉴욕에서 버몬트의 숲 속 낡은 농가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채소를 경작하며 최소한의 소비생활을 통해 삶을 일구어 갔다. 자연친화적이면서 절제된 부부의 삶을 궁금하게 여기는 방문객들을 맞았으며, 그중 펄 벅 여사는 자연 그대로의 숲 속 생활을 담은 책을 쓰도록 두 사람을 격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책이 바로 <조화로운 삶>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경제적 자립에 헬렌이 한 때 청혼받았던 네덜란드 귀족이 죽으며 남긴 유산이 기여했다는 점이다. 부부는 그 유산으로 농장 근처의 사탕단풍나무 숲을 사서 나무의 수액을 뽑아 시럽을 만들어 팔 수 있었고, 시럽 만드는 노하우를 정리하여 <사탕단풍 책>을 펴내기도 했다. 청혼을 거절한 남자의 돈으로 자립의 토대를 일구다니! 삶이란 어찌나 이리 아이러니하면서도 오묘한지..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이 부부가 보여준 또 다른 파격은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에 이르는 방식이었다. 90대 중반까지 원기를 잃지 않았던 스코트는 죽음을 '끝이 아닌 변화'로 받아들였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듯 죽은 사람의 생명력은 빠져나가지만 어딘가에서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간다고 믿었다. 그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100세 생일을 지나자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실천했다. 건더기가 있는 소식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주스 같은 음료만을, 그다음엔 물만, 그리고 마지막엔 물마저 끊는 단식을 하며 천천히 죽음에 이른 것이다. 헬렌은 그 죽음이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었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었다'라고 묘사한다.


어떤 헐떡임이나 경련도 없이 믿을 수 없게 순조롭고 편안한 임종이었다고 하니 이리 평온한 죽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문득 위안을 받는다. 품위 있는 생의 마지막을 동경하는 중년으로서 스코트의 죽음에서 한가닥 빛을 본 듯도 하다. 에세이를 통해 삶으로나 죽음으로나 귀감이 되는 이 두 사람을 알게 되어 왠지 든든한 기분이다.


이 부부의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 책을 권한다. 위에 언급된 내용 외에도 헬렌의 전 연인 크리슈나무르티 이야기라든가, 스코트의 전처와 아들들 이야기 등 흥미로운 부분이 여전히 많다. 권태에 빠지고 싶지 않고, 늙고 싶지 않은 중, 노년들에게도 추천한다. 읽어보면 도움받을 내용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자식 잘 키우는 일만이 일생의 과업이라고 여기는 부부들에게도 권한다. 뭔가 관점을 확장시킬 다른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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