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 만나기
자식을 키운다는 건 때때로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미처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넘겼던 일들을 몇십 년이 지난 후 아이를 통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주로 부끄럽던 나를 떠올리게 되는 건 나만 그런 걸까. 오랜 세월을 보낸 후 그제야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얻는 것이 귀하다. 내가 했던 선택들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앞으로는 어찌 살고 싶은지도 종종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초등 2학년이던 딸아이가 어느 날 하교하고 현관에 들어서는데 표정이 울기 직전이다. "무슨 일 있었니 학교에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인즉슨, 단원평가 시험에서 골똘히 생각해도 답을 모르던 문제가 있었는데 시험이 끝나고 답안지를 걷다가 앞자리에 앉은 경쟁하던 친구의 답을 보고 베껴서 써냈다는 것이다. 손을 덜덜 떨면서 답을 베꼈는데 그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가 자기를 본 것 같단다. 자기가 그 애 답을 왜 적었을까 집에 오는 내내 후회가 되고, 선생님이 아시면 어떻게 되냐며 연신 손등으로 솟구치는 눈물을 쓸어낸다. 조그마한 딸애의 순도 높은 양심이 귀엽기도 하고, 선과 악의 시험대에서 유혹에 넘어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녀석이 안쓰럽기도 하다. 울먹이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어렸을 적 비슷한 비행을 저질렀던 일이 떠오른다. 위로가 될까 싶어 아이에게 조심스레 내 이야기를 들려주자 가라앉았던 당시의 감정도 스멀스멀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 때 5개 반 연합 커닝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적이 있다. 기억해 보건대, 입시 전쟁터인 고입을 목전에 두고 중학생활을 마무리하며 좀 낭만적인 추억 하나 가져 보려던 의도였기도 했고, 시험과 성적에만 가치를 두는 학교라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특정 과목의 5개 반 평균이 90점대를 넘었고 담당 과목 선생님은 아주 화가 나셨다. 학교는 발칵 뒤집어져서 주동자를 색출해내기 위해 학생들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였고 결국 주모자가 나인 게 밝혀졌다. 어떤 선생님은 "네가 어떻게?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하시며 나름 반 간부에 성적이 좋았던 나에게 쓴 배신감을 표하셨고, 나의 징계 방법을 고민하셨다. 큰 인절미 한 덩어리를 욕심껏 삼켰는데 채 넘어가지 못하고 목구멍 바로 아래에 꽉 막혀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며 수일을 보냈다. 시간을 지울 수 있다면 그 사건을 흔적 없이 지우고 싶었다. 마음이 평온했던 날들이 간절히 그리웠다. 결과적으로 졸업이 코앞이라 별다른 큰 징계는 받지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그간 크고 작게 가끔씩 벌여왔던 분별없던 비행을 더 이상은 계속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더 어렸을 적 이웃집 감말랭이를 몇 개 훔쳐 먹고 난 뒤에 느꼈던 조마조마함이나, 허술하게 놓아둔 엄마 지갑에서 몇 푼 꺼내어 군것질하던 때에 느꼈던 거북함과는 격이 다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그 불편한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서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순한 감정이 아닌 여러 감정들이 뭉뚱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믿었던 선생님을 실망시켜드린데 대한 죄송함, 나를 따랐던 순진한 친구들이 마음고생한 데에 대한 미안함, 처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오만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었다. 이제야 이름 붙이자면 그건 죄책감이지 않았을까. 그 죄책감은 내가 이후 '선'을 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주었고, 착하게 살고자 하는 '양심'을 비로소 내 안에 굳건히 자리 잡게 했다.
나의 경우, 죄책감이 나아갔던 방향이 '선'을 넘지 않고 '양심'있게 살아보려 애쓰는 쪽으로 흘렀다면,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 The Kite Runner>에서의 두 주요 인물은 다른 양상들을 보여준다. 아버지 바바는 젊은 시절 혼외자식을 만든 일에서 비롯된 죄책감을 전 생애에 걸쳐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고아원을 세우고, 어려운 친구들에게 돈을 주는 등의 선행을 베풂으로써 속죄하고자 한다. 죄책감이 구체적인 선행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과연 바바는 그런 삶의 끝에서 죄책감의 짐을 남김없이 덜어내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까 궁금하다. 또 다른 인물, 주인공 아미르는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이복동생 하산을 배신한 죄책감으로부터 평생 도망치고자 애쓴다. 하지만 도망치려던 마음만큼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매우 깊었나 보다. 다시 착해질 수 있다는 아버지 친구 라힘 칸의 편지 글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죄를 맞닥뜨릴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간절하지 않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아미르는 운명적 처벌을 달게 받음으로써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희열을 느낀다. 처벌의 대가로 조카 소랍을 데려온 것은 아미르가 행할 수 있는 궁극의 선행이기도 했다. 죄의 경중은 다를지도 모르나, 나라면 20년도 지난 후에 부끄러웠던 나의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는지 또 내 과오들을 속죄하는 선행을 얼마나 실천으로 잇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나의 유년시절 비밀을 알게 된 딸은 엄마의 비행들에 놀라워하면서도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에 안도하며, 선생님께 용서를 구할 용기를 내기로 했다. 힘을 내는 딸이 고마웠고, 자신의 고통스러움을 흔쾌히 나눠 줘서 고마웠다. 중 3 때 커닝 사건 이후로 선을 넘지 않고 살기로 했지만, 무지하고 유혹에 약한 나는 여전히 많은 어리석은 실수와 과오들을 범하고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를 통해 되살려진 나의 어린 시절 비행들이 나와 아이가 함께 성장할 좋은 거름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이리 쓰일 줄 누가 알았겠나.... 삶은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