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힘 좀 빼고 살고 싶다

by 지수

세상사 맘먹기에 달렸다고 단순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다분히 그런 경향이 있긴 하다. 목표가 있다면 전력투구해서 못 이룰 게 없다고 여겼고,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건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살면서 지레 포기한 적도 있으나 죽으라 노력해서 목표를 이룬 일도 있다 보니,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보다 의지와 노력을 중요시했다. 의지와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 널렸고, 그중에 제일은 자식일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아이의 미래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했으니 내가 먼저 열심히 살면 아이도 따라 하는 줄 알았다. 손에서 책을 놓질 않았고, 영어 자격증을 땄고, 사회이슈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견을 나누었고, 시간을 내어 몸으로 함께 뛰어놀았다. 아직 아이가 성장 중이니 내 욕심대로 컸는지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분명한 건 아이가 점점 내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고등학교 2학년인 아이는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들 즉, 게임하기, 피아노 치기, 유튜브 영상과 영화보기, 각종 캐릭터를 그리느라 하루가 바쁘다. 가끔 영상편집과 포토샵도 하고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하기도 즐긴다. 제발 좀 성실히 살라는 나의 잔소리와 밥해주는걸 무기 삼은 나의 협박에도, 굶을지언정 절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놀 수 있을 때 맘껏 놀아야 한다고, 어른이 되면 맘 편히 놀 수 있겠냐며 도리어 나를 설득한다. 아이를 내 맘먹은 대로 키울 수 있을 거란 굳은 의지가 점점 약해져 간다.


사실 삶의 핵심 부분은 이미 운명적이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고,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남편을 내가 선택했다고는 하나 그 시기에 내 주변에 그가 있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운명적이다. 내가 노력해서 이루었다고 믿는 대학원 입학도 그렇다. 사실 노력은 할 만큼 했지만 떨어지고 붙고는 내 소관이 아니지 않은가. 운이 좋았을 뿐. 그런데 왜 열심히 노력만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노력 지상주의의 신념을 굳게 믿고 살았던 걸까. 수험생 때에는 4당 5락이란 말이, 갓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열정 페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귀에 울리던 '무조건 하면 된다'던 세상의 구호들이 썩 맘 내키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나의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공들여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이룰 수 없을 때도 있고, 별 노력 없이 싱겁게 일이 성사되는 경우도 삶에는 분명히 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일의 결과에 그리 목매고 살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원하던 대로 잘 되면 고마운 거고 설령 안 되었다 해도 이 길이 내겐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사실이 남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저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삶의 여정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살고 싶다. 사람은 결국 다 제 복대로 사는 거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너무 운명론적 생각인가.


작가 유시민 님과 만화가 정훈이 님이 함께 쓴 <표현의 기술>이란 책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주인데 좋아했던 부분은 바로 정훈이 님이 만화가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삼수해서 대학에 떨어지고 6개월 만화학원 다니다가 동사무소에서 보충역 생활을 마치고 백수로 지내는 중에 어쩌다 보니 만화 공모에 당선되어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 이런 삶도 있는 거지, 어떻게 항상 노력하는 사람만 성공한다는 법이 있나.' 싶어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냥 반가웠다. 최근엔 하완 작가님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란 책이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모양이다. 빌려보려고 검색해보니 인근 8개 도서관이 모두 대출 중이다. 구입해보니 작년 4월에 출간하고 벌써 초판 18쇄이다. 우와, 이 작가님 부자 되었겠다. 돈 버는 노예보다 불안한 자유를 당당히 누리고자 직장을 용기 있게 그만두고, 부자가 못 되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안 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는데, 이제 책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되었으니 다음엔 어떤 내용의 글을 쓰시려나 급 궁금해진다. 여하튼 정훈이 님도 그렇고 하완 작가님도 그렇고 다 그렇게 사는 복을 타고난 게 아닐까.


아이는 아침부터 헤드셋을 끼고 무슨 드라마인지 영화인지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저러라고 아침에 깨워 밥 먹인 거 아닌데..... 의지와 노력을 중시하는 내 고질적 습성과 살면서 믿게 된 운명론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오락가락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읽으며 오늘은 운명론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야겠다. 노력을 경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삶이란 어차피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와 약간의 행운과 반갑지 않은 시련과 불행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니 말이다. 뒤죽박죽 세상, 힘 좀 빼고 살면 안 될 이유가 무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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