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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슬기 Dec 19. 2019

7월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나 봤었던 일력이 내 방에 걸려있다. 

요즘에는 레트로가 유행하면서 이른바 뉴트로를 빼놓고는 요즘을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졌다. 

내 방에 걸려있는 일력이 요즘 유행의 산물이다. 

단골로 다니는 카페에서 작년 말에 만들었다면서 내게 주었던 일력이다. 

매일매일 찢어서 쓴다는 게 어릴 때에는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가 않다. 

일력을 하나씩 찢어 가며 시간의 흐름을 손 끝으로 느낀다는 일, 

30대 후반이 된 나에게는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며 아쉬운 말들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아니지만 일력을 찢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으면 일력은 어느새 “너의 인생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온다.

오늘 날짜는 7월 21일이다. 일력이 보여주고 있는 날짜는 5월 18일. 

두 달 동안 일력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일력이라는 것은 하루라도 빼먹으면 들통이 나고 마는 물건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부지런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유쾌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 일 하는 것 같아서

내 상태가 어떻게 되었든 그쪽의 형편에 맞추지 못하면 굉장히 실례가 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5월 18일에 멈추어 있는 일력을 오늘 날짜에 맞추어 놓고 싶어 졌다. 

매일 한 장씩 찢을 때는 몰랐지만 한 번에 많은 양을 찢으려니 굉장한 수고가 필요했다. 

대략 10장쯤 되는 분량을 찢으려니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던 20대에 비하면 그 횟수를 비교하기가 민망해질 정도로 

운동과는 거리감이 생긴 30대의 나의 하루하루가 일력 속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저래 일력은 기분이 나쁘다. 

5장도 찢어지지 않았다. 이 일력,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질긴 종이인 모양이다. 

3장을 찢어보니 비교적 잘 찢어지긴 했지만 끝에 자투리 종이가 남아서 보기 싫은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2장씩 찢으니 문제가 없었다. 일력을 오늘 날짜까지 북북 찢어내고 있으니 

순탄치 않았던 지난 일들을 지우려는 모습 같았다.(무모하게도)

그리고 내 눈 앞에 보이는 7월 21일. 

두 달 분량을 찢어낸 일력은 바닥을 하얀 눈 덮인 거리로 만들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뭉쳤더니 이번에는 하얀 눈덩이가 되었다. 

눈덩이 같은 지난 일력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의자에 앉아 7월 21일을 나타내고 있는 일력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새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라며 당시의 현장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는 이상형에 가까운 여자 친구의 집 앞에서 이별을 통보받고 있다. 

이유는 새로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서 이미 사귀고 있다는 것. 장마 기간이라 비는 억수 같이 쏟아졌고 

나에게는 그 당연한 우산 하나 들고 있지 않은 채로 비를 맞으며 그녀의 집 앞에서 이별통보를 받았다. 

갑자기 연락이 잘 닿지 않는 것에 나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보이는 모습으로 라도 마음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챙겨 입은 스파 브랜드의 싸구려 회색 정장 세트. 

그 정장 세트는 여자 친구의 마음의 변화는 고사하고 비에 홀딱 젖어 내가 딛고 서있는 

아스팔트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져 버렸다. 

이별을 통보하던 여자 친구가 입은 바람막이는 비정하게도 빗방울을 모두 아스팔트로 떨궈내듯 

내 마음을 바닥으로 떨궈 버렸고, 

신고 있던 레인부츠는 아스팔트에 고여있는 빗물을 허락하지 않듯 나의 마음을 차단했다. 

들고 있던 민트색 우산은 비에 젖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빗속에서 눈에 띄게 빛이 났다. 

여자 친구의 말과 눈빛, 행동 그리고 물건들까지 모두 완벽하게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서있기만 했을 뿐인데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가슴은 얼음을 안고 있는 것처럼 시렸다. 

그렇게 시야에서 민트색 우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빗속에 서 있었다. 

그림. 홍슬기

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날은 7월 22일. 일력을 7월 21일까지 열심히 찢고 나서야 그때 일을 기억해낸 것이다. 

7년 전 그 날 나의 대부분이 빗물에 떠내려 갔다. 

그날 떠내려 간 나는 지금 쯤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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