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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Aug 19. 2022

귀(貴)천(賤)에 대한 강박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을 불문하고 존재 자체에 등급을 나눠버렸던 신분제도는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양반과 상놈의 구분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그 구분이 무의미해졌고 근대화, 산업화로 이어진 급격한 사회변화는 신분제도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그렇다면 신분제도와 함께 신분 의식도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친구에게 고등학교 동창의 안부를 묻던 중 친구는 그 친구의 근황을 얘기하다 '걔는 잘 살잖아'라고 했다. 그 말은 그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부자였으니 그 친구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곧 돈이 많다는 것, '잘 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과 일치시키는 한국 사회의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신분 의식은 특히 교육에서 더 두드러진다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는 친구는 아이들을 00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데 그 유치원의 부모들은 의사, 한의사, 변호사 등 흔히 말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직업군의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00 유치원 모집요강에 부모의 직업군이 자격요건으로 나왔을 리는 만무하니, 부모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고급 외제 자동차, 명품 가방에 더해 그 아이들의 00 유치원 원복과 가방은 원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장차 노동자가 될 것이다. 또는 노동자의 가족이 되거나 화이트칼라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이나 부모 대부분은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경영자가 될 것처럼 군다"

<청소년에서 편향, 왜곡된 직업관 조장하는 교과서 - 경향신문 사설 중 >


한국의 교육에서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내용이다. 전문대에 대한 편견은 또 어땠나, '거기 2년제잖아, 전문대네'라는 말로 전공과목과는 상관없이 일반대학에 비해 하위등급이라는 편견 만연하지 않았던가


공돌이 공순이라는 표현,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사이의 격차 등 직업에 대한 차별의식은 여전하고, 내 아이들은 몸쓰며 땀흘리는 노동자하고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교육에 열을 올린다.


권력과 부와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교육에서의 성공이 여전히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립유치원에 보내고 특목고에 입학시키기 위해 고액 과외를 서슴지 않는다. 부동산의 가격을 좌우하는 3가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학군이 아니던가. 교육으로 성공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구는 뜨겁다. '성공한 교육 = 명문대학 입학'이라는 공식이 여전히 버젓하다.


한국사회에서 꽤 오래전부터 대학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대학이라는 간판에 목을 매는 교육 현실은 더 높은 신분을 갖기 위한 귀천의식의 연장이라고 보인다.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업무가 있다. 업무상 흔히 말하는 의전, 바로 상사를 모시는 것이다. 나의 직장상사와 그보다 더 높은 분과의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자리였다. 식사 장소부터 메뉴, 이동수단을 정하고 식사 후 산책할 장소까지 물색해 뒀다. 시간에 맞춰 상사를 모시러 내려갔고 의전차량은 이미 정문에 대기한 상태, 차량 이동 노선도 체크, 도착시간도 체크해 뒀다. 식사 중에는 음식이 상사분들의 입맛에 맞는지, 부족하지는 않은지, 빠르게 눈알을 굴리고 몇 번이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아침드라마 스토리처럼 뻔한 안부인사와 덕담, 그리고 업무이야기를 매우 흥미로운 듯 듣는다.


상사분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의전차량은 이미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아야 한다. 바로 옆 수목원으로 이동해 산책을 시작했는데, 아뿔싸, 산책 코스를 정해두지 않았다. 직속 상사분은 자꾸 눈치를 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물었고, 몰라도 아는 척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 대로 안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땀이 났다. 다음 일정에 맞추려면 시간 내 수목원을 벗어나 다시 회사로 출발을 해야 하는데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의전이라는 것을 완벽히 해내려면 내가 그 상사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보다 힘없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받는다.

선거철이 되면 '국민의 공복으로 이 한 몸 바치겠다'며 머리를 조아리던 정치인들도 금배지를 달자마자 자신은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임을 매 순간 확인하려 하고, 기대했던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면 본성 드러낸다.


얼마 전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여기 책임자 나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년 남성을 봤다. 이유야 어찌 됐든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상황에 보는 내가 다 부끄러워졌지만, 그 남성은 그곳에서는 자신은 누군가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이고,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사회에서 '갑'과 '을'의 관계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부모와 자식, 선생님과 제자,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고용주와 피고용주, 임대인과 임차인, 종업원과 손님 등 얼핏 보아서 힘의 우열이 가려지는 관계뿐 아니라, 직장동료, 친구, 가족 등 등급과 서열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관계에서도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의 관계로 설명하려 든다. 그런데 외국 그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의미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는 없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의 우열을 가리려는 마음의 습관이 '갑과 을'의 관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들의 사회적 인정 욕망은 유난히 강렬하다. 권력과 부와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욕망이 너무 뜨겁다.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신분 의식은 여전히 팽팽한 한국사회에서 성공을 통해 맛보는 권력의 맛은 아주 달콤하고 매혹적이다.


돈, 직업, 지위, 학력, 외모 등 새로운 기준들에 의해서 사람의 귀천이 나눠지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등급과 서열이 나눠지고 나는 귀한 사람인지, 천한 사람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위치를 가늠하게 된다.


신분제도는 분명 사라졌다. 그러나 신분 의식은 아직도 만연하다. 겉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지만 내면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성이 있었다. 머리는 변하지만 의식과 감각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신분 의식, 귀족적 차별의식이 만연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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