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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나 Jan 22. 2020

딸의 핑크 자전거

딸아이는 작년부터 공주병이 한창이다. 


의상을 고르는 취향이 생겨서 드레스를 좋아하고, 어떤 날은 꼭 드레스를 입고 어린이집을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치렁치렁한 공주 드레스가 아니라 원피스 정도의 의상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랄까?


이런 우리 집 공주님이 한창 빠져있는 캐릭터는 바로 ‘시크릿쥬쥬’이다. 


“치링 치링 치리링~!”


각각 다른 색상을 컨셉으로 한 개성이 뚜렷한 다섯 명의 캐릭터들은 항상 샤랄라 한 옷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 다섯 명의 요정들이 착용하는 모든 액세서리와 의상 등은 상품으로 나온다. 시크릿쥬쥬 캐릭터가 그려진 장난감과 제품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딸아이의 시선을 빼앗는다. 그래서 시크릿쥬쥬 원피스뿐 아니라 인형의 집, 다섯 종류의 인형, 그 외 다양한 캐릭터상품들이 집안 곳곳에 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코 앞에 대형마트가 있어서 마치 동네 슈퍼마켓을 이용하듯이 그곳을 가는 우리 가족은 여느 주말에도 어김없이 그 대형마트에 방문했다. 


사실 대형마트는 여기저기 아이를 유혹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4살이 되면서 고집도 세지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떼를 쓰는 딸에게 대형마트나 쇼핑센터는 여기저기 폭탄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바깥 활동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내부에서 식사도 할 수 있고 값비싼 것을 구매하지만 않는다면 비교적 큰돈을 들이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 자주 가는 편이다.


구조에 익숙해서 어느 곳에 아이의 떼씀을 유발하는 것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되도록 그런 구역은 피해서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그런데 그 날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1층의 자전거 판매점에서 일이 터졌다. 자전거 코너 한 켠에 있는 핑크색 ‘시크릿쥬쥬 자전거’를 보더니 아이는 그 자전거가 갖고 싶다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안돼. 우리 집에는 이미 자전거가 있어. 집에 자전거는 한 대만 있으면 되는 거야.”


말로 아이를 타이르려 했지만 아이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우는 아이를 달래서 마트를 벗어났지만 그 이후로도 ‘시크릿쥬쥬 자전거’에 대한 아이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마트에 갈 때마다 자전거 앞으로 가서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며 몇 차례 자전거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자전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내가 더 큰 언니가 되면 쥬쥬 자전거 사줄 거야? 나 자전거 잘 탈 수 있단 말이야.”



아무리 자전거를 잘 타고 아무리 키가 커져도 우리 집에는 이미 할아버지가 사주신 핑크색 자전거가 있었다. 그리고 크기도 ‘시크릿쥬쥬 자전거’와 거의 같았기 때문에 또 자전거를 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보니 현관 밖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가 현관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날 낮에 아이가 자전거를 안으로 들인 후에 아끼던 시크릿쥬쥬 스티커를 자전거 여기저기에 붙여 두었단다. 그리고 퇴근한 나에게 딸은 자신의 자전거가 ‘시크릿쥬쥬 자전거’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어머~ 너무 예쁘다. 마트에 있는 쥬쥬 자전거보다 쥬쥬랑 릴리도 훨씬 많이 붙어있고 정말 예쁜걸. 이걸 다 네가 만들었어? 정말 멋진데~!”


나는 아이의 행동이 기특해서 자전거가 멋지다며 칭찬을 마구마구 해 주었다. 아이는 뿌듯해하면서 자신이 꾸민 자전거에 올라타기도 하며 기뻐했다.


사실은 순간 얼마나 ‘시크릿쥬쥬 자전거’가 가지고 싶었으면 이렇게 스티커를 붙여서 만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꾸민 자전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다음 날 그 자전거를 타고 어린이집에 등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의 사달라는 고집에도 끝까지 마트에 있던 자전거를 사주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아이가 사달라는 것에 대해서 다소 관대한 편이었다. 아이가 사달라고 떼를 쓰고 울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감정을 겪는 것이 안타까워서 결국 사주게 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회사에 다니느라 딸과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물질로 보상하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보니 엄마보다 아이가 훨씬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괜히 아이의 울음 앞에서 마음이 약해 지기만 했는데,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해결책을 스스로 찾았던 것이다. 적당한 결핍이 창의성을 낳는다고 했던가. 


오늘도 이렇게 어리숙한 엄마는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마음이 뭉클했다. 

엄마보다 네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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