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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나 Jul 29. 2019

엄마가 일하는 이유 : 딸에게 핸드백을 사주기 위해

외국계 리서치 회사에서 30여 년 일하고 있는 K는 50대의 나이에도 주로 30~40대 초반이 주축을 이루던 MBA에 진학하여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진학을 결심했을 때 K의 남편은 '이제 정년도 몇 년 남지 않았는데 무슨 공부를 하려고 하느냐'는 반응이었지만 계속해서 열정을 쏟을 곳을 찾던 K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바라본 그녀는 권위, 꼰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공부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고 항상 겸손하게 말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는 인자한 언니였다. 종종 그녀가 이야기하는 회사생활에 대해 듣다 보면 어떻게 하면 조직관리를 더 잘하고, 어떻게 하면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줄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분을 '음유시인'이라고 불렀다. 같은 반 동기 40여 명이 참여하는 단톡방은 동기 중 누군가의 생일이 오면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재미있고 개성 있는 글도 있고 바빠서 상투적인 표현만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중에서 K의 메시지는 항상 돋보였다. 그녀는 상대방의 장점이나 특징을 콕 집어서 칭찬할 줄 아는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K와 함께 쇼핑몰을 가게 됐다. 핸드백과 구두를 판매하는 샵에서 K는 숄더백을 이리저리 매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이 가방 좀 한 번 매 볼래? 딸에게 핸드백을 사주고 싶은데 뭐가 잘 어울리지 모르겠네. 자기가 우리 딸이랑 키가 비슷한 것 같으니까 한번 매고 사진 좀 찍게 해 줘."


K는 몇 개의 가방을 고르더니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나는 선뜻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가방을 어깨에 걸친 나의 사진을 찍는 그녀는 마치 자신의 가방을 사는 거처럼 즐거워 보였다. 


"우리 딸이 얼마 전에 취직했거든. 회사에 가지고 다닐 예쁜 핸드백을 꼭 사주고 싶었어. 요즘 애들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할라나? 이 정도 스타일이면 괜찮을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딸에게 일하는 엄마로서 핸드백을 사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3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한 엄마에게 핸드백을 선물받는 신입사원 딸은 어떤 마음이 들까?


몇 장의 사진을 찍어 딸에게 카톡을 전송하는 K를 보며 20년 후 내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역시 20년 후에도 여전히 후배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여전히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딸이 엄마의 사회생활을 자랑스럽게 생각할까?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은 언제부터인가 평일에는 '나는 어린이집, 엄마랑 아빠는 회사'라는 개념을 확실히 알게 됐다. 하루는 주말 저녁에 다음 날 회사에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을 계란과 바나나를 봉투에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딸이 물었다.


"엄마, 그거 회사 가져가려고?"

"응, 엄마 내일 회사 가서 먹을 거야. 엄마 내일 회사 가는 날이야."


그 말을 들은 딸은 자신에게도 봉투를 달라고 하더니 계란, 바나나, 자신이 좋아하는 빵, 삶아놓은 옥수수까지 한 가득 먹을거리를 담았다. 그리고 내가 핸드백에 간식거리를 넣는 것처럼 자신도 묵직한 봉투를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두는 게 아닌가.


엄마의 출근과 자신의 어린이집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딸의 모습을 보니 기특하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엄마의 사회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하원 할 때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오는데 왜 자신은 할머니가 오는지, 다른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엄마가 맞아주는데 왜 자신의 엄마는 먼저 집에 와서 맞아주지 않는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불쑥불쑥 든다. 


그런 질문을 하면 엄마가 회사를 가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그래도 엄마에게는 우리 딸이 가장 소중해'라는 메시지를 한결같이 전달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아이가 엄마와 아빠의 출근을 인식하면서부터 항상 해 오던 것이었다.


이직할 때 면접에서 항상 '아이는 누가 양육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당연히' 아이를 돌봐야 할 엄마라는 사람이 지금 이렇게 면접장에 와 있으니 그 '특이한' 상황에서 대해서 그럴듯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질문으로 인해 '엄마가 일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더욱 애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딸에게 일하는 엄마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엄마가 일하는 이유'에 대해서 항상 고민을 안고 있던 나는 K에게 어떻게 하면 자녀 둘을 키우면서도 오랫동안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K는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이야기했다.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냥 당연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아이들도 아마 그렇게 여기고 있을 거야."


나보다 더 일하는 엄마가 익숙하지 않았을 시절을 살아온 K는 담담해 보였다. 물론 30년 간의 시간 속에서 아무런 고민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해 오지 않았을까. 스스로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자녀들에게도 그런 사고가 전해지고 그 속에서 자녀들도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는 자꾸만 엄마가 회사를 가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으려고만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속에는 나 자신조차도 나의 사회생활이 당연한 것이 아닌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불안감이 숨어 있었다. 아빠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텐데 왜 나는 어떤 대답이 좋을지 육아서적이나 육아전문가의 글을 뒤져가면서 고민하고 있는걸까?


우리 딸이 언젠가는 엄마가 회사를 다니든 그렇지 않든 모든 가족들에게는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며, 우리 가족은 우리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물론 딸이 엄마가 회사에 가지 않고 더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아빠만 회사 가. 엄마는 나랑 같이 놀아.'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던 아이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고민하고 설득하려 애쓰기보다는 한결같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가 엄마의 출근을 결핍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는 방법일 것이라고 믿는다. 물 흐르듯 그렇게 우리 가족만의 삶의 방식이 완성되어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딸의 핸드백을 사줄 수 있는 그 날을 상상하면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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