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두나 Aug 08. 2019

금수저 워킹맘

친정엄마의 삶을 갈아 넣어 내 삶을 만드는 중

워킹맘 수저론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친정엄마가 애 봐주면 금수저,

시어머니가 애 봐주면 은수저,

도우미나 어린이집에 애 맡기면 흙수저.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친구와 대화 중에 나왔던 이야기다. 그 친구는 나에게 '너는 금수저 워킹맘'이라면서, 자신은 아이를 낳는 순간 전업주부가 되거나 겨우겨우 흙수저 워킹맘이 될 예정이라 아이를 선뜻 갖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친정엄마가 육아와 살림을 모두 도와주고 있는 정말 복 받은 금수저 워킹맘이다. 친정엄마는 젊은 시절에는 한량인 남편을 대신하여 집안의 수입을 대부분 책임져오며 살림까지 해왔고 우리 두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그리고 지금은 손녀 육아와 딸의 집 살림까지 해 주고 계시는 헌신적인 슈퍼우먼이다.


친정엄마의 살뜰한 보살핌 덕분에 아이는 또래보다 신체 발달도 빠르고 정서적으로도 큰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다. 애착도 할머니가 1순위기에 내가 출근하더라도 월요일 아침에만 좀 찾을 뿐이지 크게 보채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회사에서 마음 편히 충분히 집중하면서 일할 수 있고 갑작스러운 야근이나 회식이 있더라도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


자랑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매일매일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죄송하며 답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으로 매일 왕복 3시간을 소비하는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친정엄마는 나 대신 아이 방으로 들어가서 아직 자고 있는 아이 옆에 함께 눕지만 이미 깨버린 잠을 다시 청하지 못하고 나처럼 새벽 6시에 하루를 시작하신다.


육아만 해 주셔도 감사한데 밖에서 12시간 이상을 보내고 해가 지고 나서 집에 들어온 딸이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친정엄마를 편하지 않게 하는 일인가 보다. 친정엄마는 육아 뿐 아니라 내가 해야하는 살림까지도 상당부분을 해주고 계신다.


나는 귀가하면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친정엄마는 저녁식사 그릇과 다음 날 어린이집에 챙겨 보내야 할 식판과 식기를 설거지한다. 남편은 나보다 퇴근이 늦어서 보통 저녁 8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온다. 한창 바쁠 시기에는 아이 얼굴도 못 보는 날이 많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우리 부부의 상황에는 입주도우미를 쓰지 않는 한 친정엄마가 없다면 우리 집의 맞벌이 생활은 불가능하다.


복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를 했다. 아이는 아직 어려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았고 때마침 계절은 겨울이라 아이를 데리고 외출도 쉽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출근해 있는 긴 시간 동안 친정엄마는 이야기할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몇 달 동안 말도 못 하는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서야 한 이야기지만 그 시간이 참 힘드셨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떤 도움도 되어드릴 수 없었다.


KCC스위첸 광고 중 한 장면



다행히 지금은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친정엄마의 사교성으로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며 며느리나 딸의 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도 많이 사귀셨다. 낮엔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번갈아가며 점심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어린이집이 끝나면 놀이터에서 아이가 친구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도 종종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을 못 가거나 잠을 잘 못 자고 새벽에 할머니를 찾으면서 깨면 할머니도 함께 깨서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낮엔 하루 종일 아이의 짜증과 보챔을 받아주느라 지친 시간을 보낸다. 한 번 깨면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하는 친정엄마는 며칠 동안 하루에 3~4시간밖에 못 자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친정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걱정이 친정엄마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함께 찾아온다.


사실 내가 큰 맘먹고 입주도우미를 들이기로 하고 친정엄마를 해방시켜(?) 드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이미 친정엄마의 육아와 살림 도움에 익숙해져서 그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됐을 때 발생하게 될 앞으로의 일이 너무나도 두렵다.




"서울로 대학을 가는 너를 혼자 올려 보내고 몇 년 동안 네가 사는 곳에 제대로 찾아가 보지도 못했지. 그렇게 십 년 넘게 너를 떨어뜨려놓고 지냈으니 이제 앞으로 십 년은 내가 널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아이는 내가 키워줄 테니 너는 계속 열심히 일해라. 이렇게 일을 그만두면 지금까지 공부한 것도 너무 아깝잖니."


친정엄마는 성인이 된 딸을 십 년 동안 혼자 살게 했다는 미안한 마음에 이제 손녀 육아의 굴레를 짊어지고 계신다. 다 큰 딸을 혼자 살게 한 일이 전혀 미안할 일도 아니고 나는 그 십 년 덕분에 굉장히 독립적인 성격의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친정엄마에게 내가 해야 역할의 대부분을 기대어 사는 너무나도 의존적인 성인이 되어버렸다.


친정엄마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내 친구가 딸네 집에서 손주를 봐주는데 애가 초등학생이래. 어릴 때는 그렇게 할머니 껌딱지라 쫄쫄 쫓아다니더니 이제 학교 다니고 좀 컸다고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면 '할머니 집에 가!'라고 한다더라. 손주 돌보려고 지방에 있는 집도 다 정리하고 올라온 게 몇 년 전이라 갈 데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찌나 서운하게 들린다던지.. 그러다가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손주가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심심했는지 병문안을 와서 '할머니, 집에 언제 와요?'라고 물어본다더라."


그 친구분 이야기를 하시면서 친정엄마는 당신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아직 어린 딸에게는 할머니가 항상 최고다. 그러나 언젠가 아이는 자랄 테고 할머니의 손길이 덜 필요할 시기가 올 것이다. 할머니의 애정이 간섭이고 잔소리라 귀찮다고 소리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느낄 할머니의 상실감은 내가 감히 상상하는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답일까. 이렇게 나는 매일매일 친정엄마의 삶을 갈아 넣으면 산다는 죄책감을 안고서도 친정엄마를 놓아드리지 못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월급처럼 용돈 얼마 챙겨드리거나 내가 휴가를 낼 수 있을 때 친정엄마에게도 휴가를 드리는 것뿐이다.




나의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정엄마의 삶을 빼앗고 있다는 죄책감은 과연 내가 일을 그만두거나 입주도우미를 구하면 해결될 일일까. 일을 그만두면 그 나름의 고통이 내 마음에는 남을 것이고, 입주도우미를 쓰는 것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오히려 아이를 생판 모르는 남의 손에 하루 종일 맡겨야 한다는 죄책감이 또 내 가슴에 얹어질지 모른다.


엄마가 엄마를 착취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맘고리즘'은 바로 우리의 가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삶의 일부를 대신해 주는 것을 맡기지 않으면서도 워킹맘이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가능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일하는 이유 : 딸에게 핸드백을 사주기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