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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두나 Oct 08. 2019

할아버지는 어린이집 실장님

워킹맘의 친정아빠도 적응해 나가는 중

나의 친정아빠는 한량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친정아빠의 모습 중 한 가지는 친구분들과 함께 밖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들어와 오빠와 나에게 양말을 한 짝씩 벗기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양말을 한 짝씩 벗기면서 아빠 발에서 꼬랑내가 난다며 하하 웃었다.


하지만 엄마의 속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술 좋아하는 아빠는 자주 취해서 들어오셨고 어린 우리들에게 아빠의 술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던 엄마는 혹시나 먼저 잠든 어린 남매가 깰까 봐 아빠를 어떻게든 조용하게 방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럴수록 더 큰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며 엄마에게 "그래, 너 잘났다!"라며 큰 소리를 치곤 했다.


친정아빠는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춤 좋아하고, 당연히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할 뿐 아니라 적성에도 잘 맞는 듯하다. 반면에 꾸준하고 묵묵히 일하는 것은 아빠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직장생활은 거의 하신 적이 없고 주로 자영업을 했는데 항상 가게를 지키는 것은 아빠보다는 엄마였다.


우리 집은 노래방을 10년 넘게 운영했다. 내 기억에 아빠는 항상 친구분들과 밖에서 술을 드시고 엄마는 노래방 카운터를 지키는 시간이 많았다. 오랜 시간 동안 밤에 일을 하고 공기 탁한 지하에서 소음을 듣고 있다 보니 친정엄마는 몇 년 동안 심각하고 만성적인 편두통에 시달렸다. 한 번 두통이 시작되면 두통약을 하루에도 몇 개씩 먹어야만 했고 약 먹을 때를 놓치면 입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두통 때문에 서울로 나를 올려 보내 놓고 몇 년 동안 기차를 타실 수가 없어서 서울의 내 자취방에도 찾아오지 못하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바보처럼 집안일과 바깥일 모두를 책임지셨다. 아빠는 집에서도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식사 중에도 엄마에게 "물"이라고 말하면 엄마는 컵에 물을 떠다 주셨다. 항상 고생하는 엄마를 보면서 왜 엄마는 아빠와 결혼해서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을까 싶었다.


그런 친정아빠도 한 때는 열심히 일했던 시기가 있었다. 친정아빠가 가장 열심히 일하셨던 시기는 IMF 직후에 약 2년 정도였다. 불경기로 노래방이 잘 되지 않자 노래방을 처분하고 커다란 냉장탑차를 구입해서 우유회사 공장에서 나온 유제품을 각 지역 도매상으로 배송하는 일을 하셨다. 우리 남매가 깊이 잠든 새벽 3~4시에 출발하여 타 지역으로 유제품을 배송하고 오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도 엄마는 새벽에 아빠를 깨워서 도시락과 커피를 싸서 배웅하고 또 몇 시간 후에 우리 남매를 깨워 학교를 보냈다. 방학이나 주말에는 아예 아빠가 졸지 않도록 함께 따라나서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두 분이 함께 고생해서 번 돈으로 오빠의 대학교 등록금과 나의 학원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매일 정해진 패턴으로 성실하게 일한 시기는 길지 않았다. 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엄마였고 아빠는 어린 내가 봐도 믿음직스러운 가장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친정아빠는 우리 남매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3학년인지, 4학년 인지도 헷갈려하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싫었던 나는 아빠와는 달리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성실함을 갖고 있으며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기분파에 울적한 기분은 오래 가지고 있지 않는 나름 쿨한 성격의 친정아빠에게도 한 동안 우울한 시기가 있었다. 바로 친정엄마가 먼 지방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와서 손녀를 돌봐주기 시작한 때부터다. 항상 친정엄마가 모든 것을 챙겨주던 상황에서 주중에 집에 홀로 남겨지게 되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친정아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에게 전화로 '이렇게 혼자 살아서 뭐 하냐. 콱 죽어버리고 싶다.'라는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종종 올라오셔서 술을 한 잔 하시면 "네 욕심 때문에 나도 고생하고 네 엄마도 고생하고 이게 무슨 꼴이냐."며 역정을 내시기도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미안함보다는 욱함이 올라와 모진 말을 내뱉었다.


"평생 엄마가 아빠 뒷바라지 그만큼 했으면 됐지 왜 또 와서 푸념이야. 아빤 비싼 돈 주고 공부한 내가 일 그만두고 전업주부 해야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아빠 때문에 일 그만뒀다고 해면 어떻게 할 거야?"


그렇다. 나 역시 아빠를 빼닮아서 철없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친정아빠는 이제 변하셨다. 밥솥을 어떻게 사용할 줄도 모르셨던 분이 집안 청소기 돌리기, 물걸레질, 빨래, 국 끓이기, 반찬 만들기도 척척 하신다. 이젠 우리 집에 올라오시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미리 밥솥에 밥도 안쳐놓고 친정엄마가 아이를 보는 동안 청소도 하신다. 집안일을 하는 수준은 오히려 우리 남편보다 낫다.


우리 집에 오셔서 계시던 날 하루는 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을 하는 자리에서 친정아빠가 남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전에는 집안일은 손 하나 까딱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못한 일이더라고. 내가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내 와이프가 훨씬 편해지는 건데 말이야. 그래서 와이프가 주말에 집에 내려오면 조금이라도 고생하지 말라고 내가 청소도 다 해 놓고 밥도 지어서 바치고 그러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에게 집안일 더 하라고 잔소리하셨던 거란다. 그 말을 듣고 다음 주말에는 남편이 먼저 일어나서 밥솥에 밥을 해 놓았다. (하지만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밥맛이 영 아니었다. 휴우...)


친정아빠는 얼마 전에 새 직장을 구하셨다. 바로 어린이집 차량 운전기사. 남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친정아빠지만 이 일만은 꼭 해보고 싶어 하셨다. 나이가 많아서 안될까 봐 걱정했는데 면접에서 어린이집 원장과 다른 선생님들이 "지원하신 분들 중에 나이는 제일 많으신데, 외모는 제일 젊으세요."라고 했다며 자랑하셨다.


친정아빠는 어린이집에서 <실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신다. 매일 오전 등원 시간과 오후 하원 시간에 에 4시간 정도 일하는 거라 일도 부담 없으시고 무엇보다도 손녀 같은 귀여운 아이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신다. 오늘도 친정아빠는 노란 어린이집 버스를 운전하시며 등 하원 하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미소를 보여주고 계실 것이다.


요즘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며 손녀의 일과를 묻고 영상통화를 하며 손녀의 재롱에 기뻐하신다. "할아버지, 다음에 오면 스티커 말고 장난감 사줘, 집에 스티커는 많아."라는 말에 기특하다면서 얼마나 웃으신지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 가정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밖으로만 도셨던 분이 이렇게나 달라지셨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는 가족과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낯설어서 그 방법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친정아빠는 손녀와 너무나도 잘 놀아주고 딸이 회사 다니면서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해주며 월급을 받아서 손녀에게 어떤 장난감을 사주면 좋을지 고민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요즘 하루가 다르게 어휘력이 늘어가는 손녀의 재잘거림을 들으면 말씀하신다.


"역시 내 딸을 닮아서 얘도 똑똑하고 말을 잘한다니까!"


그렇게 딸에게 갖고 있던 사랑이 손녀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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