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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책장 Jul 06. 2023

긴 시차를 지나 마침내 다다른 사랑의 여정

백수린 <눈부신 안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속 주인공 니나의 대사이다.

꿈도, 사랑도 컸지만 그보다 삶의 짐이 더 커 독일행 파독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선자이모는 새 일기장을 쓸 때마다 앞 장에 이 문장을 적어놓았다. 등에는 삶의 짐을 지고, 눈에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살아갔던 이모, 이모의 가장 큰 호사는 독일 마을의 풍경 속을 걷는 거였다.

뇌종양으로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모의 마음 한 켠에 이루지 못한 꿈과 만나지 못한 사랑을 품고 살았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선자이모는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 속 인물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 K.H. 그를 찾는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책 속에서 독일의 한 시절을 살다왔다.

선자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주려는 사람은 주인공 해미이다. 해미는 독일에서 만난 친구 레나와 선호와 함께 선호의 엄마인 선자이모의 첫사랑 찾기에 몰두한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그리움의 정원에서>라는 책에서 '진정한 거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p.86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국에서 이방인의 마음으로 살았다. 선자이모의 아들 선호는 왜 아빠가 아닌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려 했을까? 이국의 땅에서 이방인의 마음을 알고 자란 아이들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이 그 사람의 집이 되기에, 엄마의 거처를 그 마음에 마련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시절 아이들은 독일에서 이방인이었다. 잠시 머물러 온 해미와 해나도,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이민 2세인 레나와 선호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마음의 고향을 가지지 못한 파독 간호사 이모들도.

그렇게 부유하던 마음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던 시절은 여름 태양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의 윤슬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채색 수묵화처럼 투명하고 다채롭게 반짝인다. 


소설 속 주인공 해미는 가스 폭발 사고로 언니를 잃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사별은 가족의 안전을 흔들었다. 어제까지 함께 있던 언니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일상을 감당하기 위해선 많은 밤과 눈물, 현실감 없는 일상을 마주하는 여러 날이 필요하다. 슬픔의 자리엔 누구를 초대할 수 없어서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오랜 시간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마음으로 장례를 치르며 살아간다.

그 슬픔은 너무나 개별적이어서 해미는 엄마의 마음을, 아빠의 마음을, 동생 해나의 마음을 다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해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듬는 방법으로 거짓말을 택한다. 엄마와 아빠에겐 독일에서 친구를 잘 사귀고 있다고, 잘 적응하고 있다고 거짓말한다.

뇌종양인 엄마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선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선자이모의 첫사랑을 찾았다고 거짓말하고 첫사랑인 척하며 편지를 쓴다. 그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그들과 결별한다. 

언니의 죽음, 사랑했던 독일 친구들에게 했던 거짓말, 그 시절 해미는 혼자서 마음의 짐을 지고 부유하며 살아간다.

그런 해미에게 마음의 거처가 생기길 마음으로 응원하며 이 책을 읽었다. 


해미는 수년이 지나 다시 한번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시도한다.

차마 하지 못한 말과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일기장 속에 묻고.

어렸던 해미보다 삶의 경험이 많아 더 확장된 시야와 층층이 쌓인 마음의 겹을 이해하게 된 삼십 대 후반의 해미는 마침내 어떤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긴 시차를 두고 선자이모의 진짜 첫사랑과 마주한 해미. 그리고 그 시절에 하지 못한 말과 마음을 가지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해미야. 우리의 진정한 거처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래. 그 시절 부유하던 너의 외로운 마음은 이제 집을 찾아갔니?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의 자리, 너의 마음의 결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만나길 진심으로 바랐어. 너를 만나는 동안 나 역시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었어. 내 사랑하는 반려 고양이 테오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거든. 지금 아이는 떠났지만 그 아이는 내 마음에 집을 지었어. 편안히 마음을 누이고 안심하며 머물 수 있는, 아무도 훼손시킬 수 없는 공간에 안전하게. 그 여정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널 만났어. 그리고 네가 참 좋았어. 슬픔을 쏟아내듯 말하지 않던 네가, 엄마를 위해 거짓말을 하던 네가, 선호와 함께 서로의 노래를 나누어 듣던 네가, 선호와 만날 시간을 기다리던 네가, 선자이모와 선호를 위해 거짓말을 했던 네가, 그 죄책감을 지금까지도 품고 있던 그런 네가 참 좋았어. 그리고 우재가 니 옆에 있어서 안심했어.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긴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매듭지어줘서 고마워. 이제 너의 사랑의 자리에서 사랑하지만 지금 곁에 없는 사람들을 원 없이 그리워하며 마음껏 행복하게 살아가길." 





https://www.youtube.com/watch?v=HI1MYlPGL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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