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탈출 심리학 2
갑작스러운 사고로 지난주 엄마와 동생이 입원을 했고 이 일로 나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이런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건만 왜 나는 이토록 힘들었을까. 급기야는 얼마 전 남편과 이야기 중에 울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황이 힘든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나는 맏딸로서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의무감은 내게 비판적 목소리를 내며 다그쳤다. '왜 이것밖에 못해? 이 정도 하면서 무슨 힘든 마음을 가져? 참 어리석게도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구나.' 이런 목소리가 내게 들렸다. 내가 하는 일들이 못마땅했고 내가 하는 수준이 참 가소로웠다. 그까짓 것 하면서 힘들다고 징징대는 마음이 한심했다.
이 목소리는 나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평소 타인을 향한 내 태도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화들짝 놀랐다. 스스로 자신을 타인을 감싸 안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내 마음 한구석에는 타인을 못마땅해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았던가.
동생이 특별한 직업 없이 이 일 저 일에 손을 대었다 발을 뺐다 하는 모습이 늘 못마땅했다. 동생에게서 아빠의 모습이 보여 싫었다. 아빠는 평생 이 사업 저 사업을 벌이다 결국 하나도 제대로 일군 게 없다는 게 안타깝고 싫었다. 이런 아빠 때문에 엄마가 뼈 빠지게 고생하셨다는 생각에 아빠를 미워하기도 했다. 모든 게 마뜩 잖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나와 안 어울리는 공무원이 된 계기도 아빠를 닮은 내가 혹시 아빠처럼 세상의 유랑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도 한몫했다.
동생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유가 일에 매진하다 이렇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 동생은 부동산 분양 업을 하고 있다. 엄마 말에 따르면 밤낮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했다는 한다. 최근 계약을 하나 성사시켰다고 좋아하더니...... 아빠는 또 어떠한가. 아빠는 동생과 엄마 사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왕복하며 반찬과 필요 물품을 나르신다. 동생을 보러 안암동 고대 병원, 엄마를 보러 노원 병원에. 암 환자인 아빠가 왔다 갔다 하기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다. (어제는 아빠가 병원에서 엄마 다 드신 반찬 그릇을 챙기다 내가 엄마에게 사다 드린 치즈를 실수로 가방에 넣어 집에 가져왔다며 밤에 치즈를 가지고 또 오셨다 한다.)
이런 가족을 알량한 내 기준으로 재단하고 마음 한구석 못마땅해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그 비판자, 나아가 요즘은 나를 못살게 학대자에게 대해서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어릴 적 성당을 다녔었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는 신부님 말씀에 감동받아 이후 나는 겉으로 남을 비판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은 내 마음속 비판의 칼날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향해 날이 서 있지는 않았는가. 겉으로 거룩한 척하는 자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5)
마음속 비판하는 자는 왜 그렇게 난동을 부릴까? 그건 내 마음속에서 '너는 잘 해내야 해.'라는 기준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생각해 본다."실수해도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너는 노력하고 있잖아. 너는 애쓰고 있잖아. 그리고 이렇게 힘든데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가잖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느냐고.
이 말을 되뇌는데 눈물이 났다. 너 애쓴다는 말. 이 말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 나는 애쓰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애쓰고 있는 나를 토닥여 주지 못할망정 비판하고 몰아치다니.
우리는 모두 애쓰고 있다. 참 힘든 세상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부족하지만 모두 애쓰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하루가 되고프다. 내 마음도 그들의 마음도 다 토닥이는 넓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