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ivhon Feb 26. 2023

내 사춘기의 종결에 관하여


 어떤 일이 막을 내렸을 때, 비로소 그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내시경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는 일이나 과묵한 애인의 마음이 돌아서는 일이 그렇다. 그리고 나의 사춘기가 그러했다.


 내 사춘기는 맹탕이었다. 사춘기라고 해서 꼭 가출을 한다거나 술이나 담배를 입에 대어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의 사춘기를 조용하게 보냈다. 하마터면 나에게는 사춘기가 오지 않는 건가 하는 착각까지 할 뻔했다. 하지만 내가 사춘기라는 시기를 지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은 그 사춘기가 끝을 맺는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춘기에 영향을 준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매트릭스 시리즈와 트루먼 쇼 같은 영화들이 있었고, 학교에서 우연히 읽었던 ‘청소년을 위한 철학적인 질문 100가지’ 따위의 제목을 가진 책이 있었다. 나는 매트릭스에서 알약을 먹는 네오와 만들어진 세상을 사는 트루먼, 그리고 우리의 뇌가 통에 들어가서 전기 신호만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책 속의 질문을 보면서 여러 공상을 하고는 했다. 그 시기에 나의 주변 사람들은 가상현실의 npc일 수도 있었고, 섭외된 배우일 수도 있었고, 통 속의 뇌로 전달되는 전기신호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 현실에 대한 공상에 꽤 깊게 빠져있었다.


 그러던 내가 공상에서 깨어난 것은 어느 조용한 밤의 일이었다.

 나는 빈 곳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있었다. 아무렇게 널러진 종이들을 버리고 책들을 책장에 하나둘씩 꽂으면서 정리를 해나가던 중에 책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문득 흘러나와 떨어졌다.

그건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이 찍혀 있었는데, 카메라를 들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사진에는 어릴 때 살던 그리운 집의 풍경과 카메라 뒤쪽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천진한 눈빛이 담겨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리움에 압도당하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현실이니 세계니, 전기 신호니 하는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은 거구나.

 나는 나도 이 사진을 찍었을 카메라 뒤의 사람(아마 아버지이지 않을까 싶다)처럼 내 사람들의 웃음을 보면서 살아가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사춘기를 채웠던 공상들은 슬며시 자리를 비켰고 내 사춘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때 가졌던 경험은 아직도 내 인생에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습관처럼 주변 사람들의 웃음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다. 누군가의 행복의 출처가 된다는 것이 꽤 행복한 일이라는 사실을, 종결 이후의 시간을 지나오며 확인했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확인해 나가는 중일지 모르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내가 가끔 문워크를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